"너도 니 이야기 좀 해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내 앞에서 20분가량을 혼자 이야기한 것 같다. 그냥 요즘 애들 가르치는 것은 어떻다, 요즘 나이 들어 몸이 자주 아프다, 이사를 할까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나는 그냥 앞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니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는 왜 보자고 한 거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지난밤 한참을 생각했었다. 뭐라고 말하지, 내가 죽는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갑자기 그건 아니지, 그럼 왜 보자고 한 건데, 무슨 이야기를 할 건데, 그렇게 혼자 한참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있다. '그래, 잘 지냈냐고, 그때 연락하지 말라고 차갑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하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면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어?"
어? 어? 어라? 어?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그..."
"그냥 친구였어." 그녀는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너는 그냥 친구, 힘들 때 기대기 편한 친구. 딱 그거뿐이었어.", "아니, 시은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알아, 무슨 말인지, 내게 너는 항상 누군가 다음이었어. 참 빨리도 물어본다." 그녀는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그녀와는 다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아직 혼자야. 그때 결국 파혼했거든. 오늘 너 만나러 오면서 이런 생각했다. 만일 그때 니가 정말 나를 데리고 도망치겠다고 했다면 나는 널 따라갔을까. 근데 만일 니가 그랬다면 나는 그냥 파혼하지 않고 다시 결혼하기로 했을지도 몰라."
나는 단 한마디도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서, 고분고분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종빈아, 나 오늘 왜 나온 줄 알아? 혹시 이제와서라도 내 눈에 멋진 모습일까 싶어서, 그리고 이렇게 나 보자고 한 것도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나온 거야. 근데, 여전히 너는 그냥 편하고 착해 보인다." 그녀는 레몬파이를 숟가락 날로 꾸욱 눌러 아주 작게 잘랐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멍한 기운에서 좀 깨야할 것 같았다. "그랬구나, 그랬었어. 고맙다. 이제야 알 것 같아.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네. 시은아, 덕분에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나는 이번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니, 반쯤은 외치듯 했다. "음, 음! 정말 고맙다. 야, 여기 커피 맛있네, 쓴 맛이 적당해서 산미가 있네." 나는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계산할게, 시은아, 그때는 미안했어. 좋은 사람 만나고."
"벌써 가게?" 시은이는 굳은 웃음으로 내게 물었다. "응, 병원에 좀 가봐야 해서. 고맙다. 음?!"
그렇게 시은이를 뒤로 하고 길에 나와보니 벚꽃이 아주 작게 봉우리 져있었다. '봄이구나, 봄이었어.' 나는 웃음이 났다.
그녀가 매번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 비참했었다. 누군가가 없을 때만 나를 찾았다는 게 서운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그런 이야기까지 하는 사람이라는 게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화도 났었다.
근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그녀를 조금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좋아했었다니, 이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이럴 때도 있구나, 전혀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구나.
바람이 벚꽃을 흔들었다. 하지만 작은 봉우리는 한참을 흔들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어이 봄을 피워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