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by 서량 김종빈

“야, 오늘 시간 어떻게 되냐? 저녁이나 먹자.” 신영이 형의 전화였다. 나를 이래저래 챙겨주는 형이라, 내가 매번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지고 있다. “예, 형, 그럼 제가 형님 회사 앞으로 갈게요.”, “아니야, 회사 앞 말고, 수원 쪽에서 보자. 위치 찍어보내줄게. 오늘은 좀 좋은 거 먹자.” 아마도 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냥 전화통화만으로도 느낌이 그랬다.


저녁이 다 되어 조용한 일식집에서 형을 만났다. “어떻게, 맥주 간단히 한잔 할래? 먹어도 괜찮냐?” 평소 같으면 물어보지도 않고 따라줬을텐데, 분명 내 이야기를 들은 듯 했다. “아, 예 주세요. 형, 제 이야기 들으셨어요? 킄.” 나는 괜히 남사시럽기도 해서 실소가 나왔다.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 병, 죽는 거냐?”, “잘 모르겠어요. 근데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살려구요.”


“미친놈, 무슨 병에 걸려도 그런 걸 걸리냐.” 형이 맥 빠진다는 듯이 웃었다. 알지, 그 기분, 나도 내가 죽는다는데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으니까. “종빈아, 니가 원래 맛이 간 건 알고 있었는데, 병까지 그런 걸 걸리니까 이제는 존경심까지 생긴다.” 형이나 나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괜한 소리를 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형, 맛있게 잘 먹었어요. 자주 연락 할게요.”, “야 택시타고 가, 택시비 줄 테니까.”, “에이, 형, 지하철이 더 빨라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택시를 잡아 세워 형을 막무가내로 태웠다. 형은 못이기는 척 타고는 이런 말을 흘리듯 남겼다. “종빈아, 나는 네가 조금 부러웠다. 그렇게나 아플 만큼 여전하다는 게 좀 부럽기도 했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구만, 부끄러운 이야기를 뭐 저리 쉽게 한데.” 나는 택시가 가는 것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이야기” 언제부터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걸까. 사랑에 휘둘리고 매달리고, 전부인양 굴던 이야기가 언제부터 남사시럽고 부끄러운 이야기가 된 걸까. 그런 것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분명 있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이야기들을 떠올리면 사랑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운 것들이 많았다. 내 딴에는 사랑이라고 했지만, 고집도 있었고, 환상, 거짓도 있었다. 사랑하는 스스로에게 취하기도 했었고, 외로움 때문에 만난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정말 사랑하기는 했었나 싶은 생각만 계속 들어서 부끄럽다는 마음이 들었나보다.


나는 조금 취했고, 봄 치고는 찬 밤공기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하나 골랐다.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마지막에 널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정말 어땠을까, 왜 그랬을까, 그저 그런 생각들만 들었다. 내 고집으로, 내 탓으로 놓친 이야기들, 나도 정말 취했는지 별의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 좀 다 괜찮아졌는데, 이 놈의 상사병이 참 사람 못나게 만드는 구나. 아닌가, 참 못나서 이런 병까지 걸리는 건가,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드는 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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