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by 서량 김종빈

새벽부터 일어나서 동네 뒷산에 올라왔다. 전에도 가끔씩 이런 변덕을 부리면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안하던 짓을 하냐?” 는 말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죽을 때가 돼서 이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다. 그리 높지도 않아서 1시간이면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는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산을 이제껏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니, 어지간히 싫었던 걸까. 아니다, 그냥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하자.


꼭대기에 몇 개 놓인 벤치에 앉아있는데, 하늘 저 어디쯤으로 비행기가 지난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기도 하지. 멍하니 비행기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다가, 한 사람이 생각났다.


때때로 가끔씩 생각나던 사람, 그냥 생각만 잠깐하고는 말아버렸던 사람, 그 사람이 생각났다. 예전 같았으면 이번에도 그냥 한번 생각하고 말았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하고 싶었다.


4년 전쯤이었다. 나는 드물게도 해외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이 없던 촌놈이었다. 친구들이 유럽여행을 간다고 한참 열을 올리던 대학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돈 번다고 못 갔고, 이후에 일을 하게 되면서는 너무 바빠서 못 갔다. 그러다 하던 일도 그만두고, 통장에 잔고는 그럭저럭 있을 때 나는 다짜고짜 쿠바 행을 택했다. 남들은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부터 다녀오라고 만류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마음가는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쿠바를 향했다.


사실 쿠바라고 해서 뭐 대단하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멀리 있다 보니 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 첫 여행을 사람들과 부대끼고 싶지는 않았기에 철저히 혼자 여행하기를 고집했다. 심지어 내 여행이 나답지 않을까봐, 남의 여행이야기조차 듣지 않았다. 캐리어가 챙긴 짐이 너무 없어서 움직일 때마다 덜거덕거렸다.


어쨌든 이렇게나 아집 가득한 시작이었지만, 별 일 없이 어느새 쿠바행 환승 비행기를 타게 되어 한시름을 놓고 있는데 그때 별일이 생겼다. 통로 쪽 좌석에 앉아서 이륙을 기다리고 있는데 통로에 거대한 배낭이 뒤뚱거리며 혼자 걸어왔다. 뭐지 싶어서 배낭을 계속 보고 있는데, 배낭을 가리고 있던 남자가 비키자, 그 사람이 있었다. 작은 편은 아니지만 조금 마른 그녀는 거대한 배낭을 짊어진 채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단발, 조금 가는 눈매, 단번에 동양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심 그녀가 내 옆자리가 아니었으면 했다.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동양인과 얽히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라서 ‘이대로 지나가라, 지나가라.’ 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 옆자리 좌석번호를 유심히 살피더니 내 옆에 섰다. 그리고 혼자 낑낑거리며 배낭을 짐칸에 올렸다.

나는 그때까지도 모른 체 있었는데, 사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지금 와서도 그 사람이 생각나면, 자연히 그 장면이 생각나고, 그때 배낭을 올리는 걸 좀 도와줄 걸 하고 생각할 정도니 참 미련도 가지가지다.


나와 그녀는 간단히 눈인사만을 하고, 그녀가 창가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행기는 그녀와 나 사이에 한 자리를 비운 채 이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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