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by 서량 김종빈

“저, 안녕하세요?”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10분 정도 지나자 나는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쿠바까지 4시간은 걸린다는데, 그 시간 내내 입을 다물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동양인이라도, 한국인이 아니라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면 미안하다고 하고 마음 편히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안녕하세요?”였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둘 다 서로 한국인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거지. 굳이 여행지를 지구 반대편까지 골라서 올 정도니, 그녀도 한국인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여행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비행기 안에는 한국인이라고는 둘 뿐이었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쿠바로 가는 비행기 내내, 라디오 이야기, 노래 이야기, 사는 이야기, 꿈 이야기, 책 이야기, 여행 이야기, 마치 그동안 밀린 이야기라도 하듯 우리는 쉼 없이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도착한 아바나, 한밤의 습한 공기가 목이며 가슴이며 찌르르 울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종빈씨, 쿠바예요. 우리가 쿠바에 도착했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 잠시 동안 쿠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게 공항에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분명 우리는 각자가 숙소를 찾아 헤어졌는데, 삶이란 때때로 장난치기를 좋아하는가 보다. 각자의 숙소는 서로의 맞은편 건물이었다. 베란다에서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뒤로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 간 카페에는 그녀가 미리 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내가 바닷가 근처 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그녀가 그늘을 찾아왔다. 그리고 도시에서 도시로 옮기고 나서도 다시 그렇게 만나기를 여러 번, 나중에는 서로 멋쩍어서 마주치자마자 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헤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할 때쯤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쿠바를 떠나는 비행기 안, 통로에서 익숙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배낭이 뒤뚱거리며 걸어 들어와서 내 옆에서 멈췄다. 거짓말 같지만, 바로 옆자리에 그녀가 앉았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전과 달리,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좀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잠깐씩 볼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한국에 돌아와서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녀를 몇 번 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연”이라는 말을 했었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아서 참 어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아무것도 할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관계, 괜한 짓으로 전부 다 엉망이 될 것 같아서 겁이 났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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