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걸었는데 돌아오는 건 친절한 안내원의 답변이었다. 또박또박 끊어지는 발음에 긴장도 끊어지는 것 같았다. 4년 전부터 공항에서 헤어질 때 받은 연락처였다. 하지만 그 뒤로 몇 번을 만나면서도 통화를 한 적은 없었다. 보통은 메신저로 뜸하게 안부를 묻는 정도가 다였고, 이 번호가 맞는지 틀린 지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란다. “아, 뭐냐, 뭐 하나 쉬운 일이 없구나.” 허공에 대고 하소연을 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별생각 없을 때는 지구 반대편에서 까지 가서 만나게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지금껏 잊지 않게 해 놓고, 이제 좀 마음을 먹으니까 없는 번호라구요, 제가 늦은 건 맞는데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반쯤은 징징거리는 말투로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대고 투정을 부렸다.
‘메신저는 되나?’ 나는 메신저를 쭈욱 훑었다, 다행히 메신저에는 아직 그녀가 있었다. “은형씨, 잘 지내죠?” 안부를 물었다. 5분쯤 지나자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럼요, 종빈씨, 오랜만이에요. 종빈씨도 잘 지내죠?” 그녀의 답장에서는 여전한 잔잔함과 밝음이 있었다. ‘아,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아직도 추억하는 거구나.’ 다시 한번 추억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참 씩씩하고,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은형씨,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차마 왜 연락처가 바뀌었냐는 말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물어본 안부였다. “저는 지금 외국에 있어요. 아프리카, 탄자니아, 세렝게티! 하쿠나 마타타!” 나는 그녀의 답장에 한동안 손가락이 멈췄다. ‘뭐야, 뭔데, 갑자기 뭔데, 무슨 아프리카인데, 뭐 어쩌자는 건데, 거기는 왜?’ 혼잣말이 또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지낸다고 했다.
“아, 정말요? 저 얼마 뒤에 그리로 여행 갈 건데!” 사람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몸과 머리와 마음이 각기 따로 노는데, 내가 그랬다. 특히나, 이번에는 따로 노는 몸 중에서도 이번에는 손가락의 단독 범죄, 나는 순간, 세렝게티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요? 정말? 저 세렝게티 근처 도시에 사는데, 오면 볼 수도 있겠는데요?” 그녀는 순진한 건지, 아니면 맹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내 거짓말이 너무 자연스러웠던 건지, 천진한 대답이었다. “그럼요, 가서 연락할게요. 밥 한번 먹어요.”
조만간 만나기로 약속을 해버리고 우리는 싱겁게 대화를 마쳤다. 서랍장 위 먼지 쌓인 지구본을 내와서 돌려본다. 탄자니아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니 그리 멀지는 않다.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그리 비싸지도 않다. 달력을 보니 그리 바쁘지도 않다.
사실, 그녀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다 보니 탄자니아를 가게 되었다. “하쿠나 마타타”라고 했나. 그래, 이쯤 되니 나도 하쿠나 마타타 하는 수밖에 없네.
뭐 갑작스럽지만, 나는 조만간 밥 한 끼를 먹으러 세렝게티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