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by 서량 김종빈

밥을 다 먹고서는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카운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와서 앉자, 종헌이가 속없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나는 너무 사랑해서 환자고, 하나는 너무 사랑을 안 해서 환자고, 그런 거 둘이서 대낮부터 커피나 마시고 있고 좋네.” 녀석이 적당히 비꼬는 걸 보니 그래도 좀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보다.


“종빈아, 지영이랑 전 남자친구, 아니, 이제는 그냥 남자친구지, 둘이 왜 헤어졌는 줄 알아? 남자친구가 학자금 대출을 못 갚은 채로 취업을 한참 동안 못하고 있었다더라. 근데 그것 때문에 점점 지영이는 지영이대로 지치고,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지쳐서 그냥 헤어졌다더라.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친구가 그만하자고 하고, 지영이는 그걸 또 그래 그만하자고 하고 해서 헤어졌다더라. 그래서 지영이가 나름 안정적인 상황의 나를 보고 만나기 시작한 거라더라. 근데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지영이를 찾아온 거지. 2년 동안 취업도 하고 학자금도 다 갚고 해서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면서 말이야.” 종헌이는 말을 마치고는 괜히 커피잔의 빨대를 툭툭 쳤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종헌이에게 말했다. “야, 너 어제 나한테 사랑이 뭐냐고 지랄한 거 기억나냐? 내가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거든, 근데 역시 모르겠더라. 나는 그렇게나 못 잊던 수영이도, 아직도 모르겠는 시은이도, 그리고 은형씨까지 다 모두 사랑이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더라.” 종헌이가 피식 웃으며 내게 핀잔을 줬다. “야, 그거 사랑 맞아. 내가 사랑이야기 함부로 잘 안 하는데, 너는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잖아. 사랑타령만 하더니 그런 경지까지 오르고, 진짜 신인류다.”

종헌이는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애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는 좀 아니긴 한데, 나는 지영이에게 이야기 다 듣고 나서 네가 좀 부럽더라. 왜 증명이 되잖아, "내가 너를 이렇게나 사랑한다, 사랑했다, 봐라." 이런 거 말이야. 왜 비참하더라, 나는 그냥 그 두 사람 사이에 껴있던 이물질 같은 거였나 싶어서 정말 너무 힘들더라.”

종헌이는 내게 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와있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이번 주말에 신혼집에서 지영씨 짐을 빼기로 해서 그냥 마주치지 않고 싶다면서, 그런데 어디 갈 기운도 없어서 그냥 집에 늘어진 채로 있고 싶다고 했다. “작은 방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고 싶은 만큼 있다 가라.” 나는 녀석이 신혼집에 혼자 덩그러니 있을 걸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워졌다.


“뭐가 이렇게 어렵냐? 종헌아. 그래도 너나 나나 어찌어찌 제 앞가림은 하면서 살았는데, 이것만큼은 잘 안되네. 어렵다, 어려워.” 나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천장을 올려다 본채 말했다. “야, 나는 사랑이 아니었던 거냐? 그럼 지난 2년 동안 나는 뭘 한 거냐?” 종헌이도 나를 따라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정말 우리는 뭘 한 건지 궁금해졌다. 뭘 하면서 사는 건지, 살기는 사는 건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야, 요즘 몸은 좀 괜찮냐?” 종헌이가 이제 좀 괜찮아졌는지 내 안부를 묻는다. “뭐, 좋다. 정말 내가 시한부 상태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좋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종헌이가 웃는다. “야, 이거 전부 다 몰래카메라면 웃기겠다. 그 있잖아, 영화 트루먼쇼 같이 말이야.”

“야, 그러면 곤란해. 지금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데, 더 모르게 되잖아.” 나도 그렇게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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