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오빠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 같아." 지금에 와서는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였었다.
그녀의 그런 말보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제대로 변명도 못하던 내 모습이었다. 어버버 하며 애써 웃으려는 얼굴은 눈코입이 제각기 굳어서 더 이상하기만 했겠지. 지금만큼만 요령이 있었더라면 그 상황을 좀 더 잘 넘겼겠지.
"너는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냐?" 하며 화를 내는 방법도 있었을 테고, "미안해, 내가 요즘 소홀했지, 내가 정말 미안해." 하며 매달리는 방법도 있었다. 아니면 "사랑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너 없으면, 널 사랑하는 나는 있을 수도 없는데, 결국은 너뿐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얼버무리며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도 있었겠지.
근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처음 하는 연애였다. 심지어 남들보다 한참 늦어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중에 연애를 했다.
사내들하고만 어울려 놀다 보니, 아는 게 없었다. 여자도 몰랐고, 사랑은 더더욱 몰랐다. 그러니 여심 같은 건 내게 우주 같은 거였다. 가본 적도 없고 알고 있는 것도 없는 전혀 모를 우주. 아니, 차라리 우주였으면 허블망원경이든 천체물리학이든 하는 것들로 어찌어찌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의 멍청한 연애는 아는 것도 없고 요령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마음은 매일 터질 듯했고, 항상 끌어안고 쓰다듬고, 하루 온종일 뭘 하든지 그녀 생각뿐이었다. 가진 것도 얼마 없으면서 전부 다 주고 싶어서 안 달나 있었다.
세영이와는 그런 연애를 했었다. 그리고 세상 수많은 남자들이 첫 연애 때 저지르는 짓을 나 역시도 저질렀다.
처음 한 달이야 미친 듯이 사랑했다. 아니 정말 미쳤었다. 그리고 세 달간은 그녀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되려고 했다. 원래의 내 모습이야 알바 아니었다. 그리고 반년 간은 매번 뭔가 그녀에게 새롭고 즐거운 것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재미있는 이야기만 보면 그녀에게 해주려고 적어놓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연료를 다 써버린 뒤에는 멈추고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요령도 뭣도 없으니, 정말 다른 방법은 찾을 수가 없었다.
통화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만나면서 웃음이 점점 줄고, 더 이상 애쓰지 않게 되었다. 관성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오빠, 변했어." 지금이야 이소리가 얼마나 위험한 신호인지 알지만, 그때의 나는 알리 없었다. 그냥 바보 천치, 등신처럼 해맑게 "뭐가 변했는데?" 되묻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무식하고 용감히 그 위험신호를 지나치자, 다음에는 폭발. "오빠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오빠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거 같아." 나는 정말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당당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자리에 굳어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 식은 게 아니었는데, 그냥 너무 지쳐서, 내가 아닌 나를 무리하게 보이고, 애를 쓰는 게 힘들어서 그랬는데,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사랑한다는 건 본래 무리하고 애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나의 무언은 긍정이 되었고, 오해는 점점 불어나서 진실이 되었다.
전에 바람피우다가 걸린 친구 하나가 내게 자신 있게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야, 씨발, 걸려도 절대 인정하면 안 돼! 눈 앞에서 걸려도 절대 인정하지 마, 그게 서로를 위하는 일이야. 무조건 아니라고 해야 돼. 인정하는 순간 남자는 남자대로 나쁜 놈이 되지만, 여자는 그때부터 비참해진다고, 서로를 위해서 절대 인정하면 안 돼." 그때는 이 무슨 "같이 잠은 잤지만 바람을 핀 건 아닙니다." 같은 소리냐, 이 병신이 뭐라는 거야 했었다. 근데 이제 보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네.
내 마음이 좀 어지럽더라도, 그래도 사랑한다고 할 걸,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가 아니라 그녀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위로해줬어야 했는데 말이다.
결국 그 시절 나의 첫 연애는 어느 정도의 진실과 오해가 뒤죽박죽 되어 맥없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