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나는 당신을 사랑했나 봅니다.

필수품

by 서량 김종빈

상자를 열었다, 다시 닫았다, 옷가지를 들었다, 다시 놨다, 그렇게 눈앞에 있는 것부터 구석에 처박아놓았던 것 까지 다 헤집어 놓고 나서야 알았다. 상자에 딱히 담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얼마 전부터 볼리비아가 뒤숭숭했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그로 인해 편이 갈렸다. 결국에는 서로 싸우고 해치고 아무튼 난리였다. 때문에 공지가 있었다. 볼리비아를 떠나야 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짐을 싸놓으라는 이야기였다.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날이 꽤 남았기에 짐 싸는 것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웠다. 어쨌거나 짐을 싸라고 하기에 상자를 꺼냈는데, 이게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상자에 뭘 좀 넣을까 하다가도 '굳이 이걸?' 하며 다시 자리에 내려놓고, 다른 걸 다시 들었다가도 '이건 여기다 주고 가도 되지 않나?' 하고 다시 또 제자리에 두었다. 얼마 안 되는 상자 속을 채울 짐이 이렇게 없다니, 그래도 여기서 2년 가까이 살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빈 상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제풀에 지쳐 관두고 말았다.

참 이상하지, 채울 것을 고르다 보니 되려 놓을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놓을 것, 놓아야 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았다. 나름 긴박한 상황, 챙길 것들만 챙겨서 상자에 넣어야 하는 순간이 오니 알겠더라. 내가 정말 소중히 하는 것들이 뭔지 말이다.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상자에는 넣지도 않은 것과 평소에는 그다지 생각도 않았던 것이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좀 뻐근했다.

예전에 친구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야, 내가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좋은 게 하나 있더라. 그전에는 그렇게 자주 만나던 사람들이 연락도 않는가 하면, 가끔 연락이나 하던 사람들이 밥 사 준다고 나오라더라. 내 상황이 좀 급해지니까 알겠더라. 누가 오래오래 볼 수 있는 사람인지."

저 뒤로 밀어놓았던 상자를 다시 앞에 끌어다 놓고 짐들을 넣기 시작했다. "이건 엄마꺼, 이건 아부지꺼, 이건 누구꺼, 또 누구꺼." 혼잣말을 상자에 새겨가며 짐을 쌌다. "이건 필요 없고, 이건 주고 가면 되고, 이건 그냥 버리고." 그치지 않는 혼잣말을 상자에 채우다 보니 이제 좀 그럴듯한 짐 상자가 되었다.

친구 말이 맞다. 가끔은 급해져 보는 것도 좋네. 급한 와중에 내가 뭘 끌어안는지 이렇게 볼 수 있으니, 정말 가끔씩은 이런 것도 괜찮다. 내게 뭐가 있는지, 그중에 정말 내 것이 뭔지, 소중한 것이 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더라.

친구들은 잘 살려나, 우리 엄마는 또 홈쇼핑에서 뭘 샀으려나, 아부지는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나, 매제랑 동생은 밥은 잘 챙겨 먹고 사나, 우리 할머니는, 형들은, 동생들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다들 어떤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짐 상자는 그럭저럭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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