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절연 선언

적응

by 서량 김종빈

“엄마, 나 한국 돌아가면 이제 청바지 그만 입을 거야.” 이렇게 엄마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다. 엄마는 반가운 소리라며, 내게 철이 들었다고 했다. 35살의 아들과 59살의 엄마가 나눈 대화치고는 뭔가 좀 민망하리만치 우습다. 하지만 우리 모자에게는 꽤나 유의미하여서 책으로 치면 책장의 한 챕터가 끝나고 새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렸을 적, 그러니까 중학생시절부터 청바지를 좋아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집착했었다. 그 정도가 심각해서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서른 전까지 외출복으로 면바지를 입은 일은 백번이 채 되지 않을 거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면바지의 느슨함이 거북해서였다. 그리고 얼룩이 생기면 티가 났고, 또, 색도 잘 바래고 내구성도 약하고, 또...그러니까 이렇게나 시답지 않은 이유로 나는 면바지 대신 청바지만을 입고 다녔다.

십대때야, 엄마도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십대가 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엄마는 내게 이제는 면바지 좀 입고 다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질기고 꾸준하게 청바지를 고집했고, 삼십대에 들어서니 엄마는 더 이상 면바지니 청바지니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나는 내가 평생 청바지를 입을 줄 알았다.

근데 사람이란, 아니 삶이란 역시 확신하고 확언하면 안 되는 건가보다. 어느 날 청바지가 불편해졌다. 그 빡빡함이, 그 억셈이 내게 성가시다 못해 불편해진 것이다. 나는 내가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건 셀 수 없이 겪었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청바지마저 변심할 줄이야. 어쨌거나 나는 점차 면바지를 입어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결심했다. ‘이제 청바지는 그만 입어야지.’

내 “청바지 절연 선언”에 엄마는 아들보고 철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했는데, 우리집도 이제 존댓말 존칭을 쓰자는 것이었다. 나는 아부지에게도, 엄마에게도 반말을 썼다. 사실 스물일곱 때쯤인가에 존댓말을 써보려고 했는데, 뭔가 서먹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오래가지 못했다. 그나마 그때 바꾼 것이 “아빠” 에서 “아부지” 였다. 내게 삶이며, 관계는 매우 유기적인 생명체 같아서 뭐 하나가 바뀌면,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것들까지도 점차 모두 바뀌어버린다. 더욱이나 호칭이나 존칭 같은 내용들은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해서, 섣불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엄마, 이제는 어머니가 바꾸자고 했다.

아마 이전 같으면, 꽤나 고민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만큼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청바지가 멋져 보이지 않는 나이, 도리어 불편한 나이, 면바지의 깔끔함이 필요한 나이, 나는 내 나이가 그쯤 되었다고 생각했다.

가끔 보면 나이를 거부하고 거절하고, 나아가 투쟁하는 분들을 만난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이다. 나이 육십에 원색 탱크 탑을 입고, 청바지를 입고 다니신다하여도 나는 그 모습에 대해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나는 나이 먹음을, 변화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대신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좀 써볼까 한다. 젊게 사니, 나이 들게 사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익히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물론 조만간 36살이 되는 내게 만일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빨간 탱크 탑이나, 찢어진 스키니 진이라면 그 또한 기꺼이 입을 테다.

분명 내게는 청바지를 고집하는 것보다도 더 중한 일들이 있었다.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내가 서른다섯이고, 조만간 서른여섯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이 전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건 내가 나를 전처럼 고집하며, 내가 보고 들은 것만을 옳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도 했다.

좀 더 들어야 했다. 보다 고민해야 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변화하는 나와 그 주변 모든 것에 어떤 것이 어울리는지 찾아봐야 했다. 전에 하던 대로 돌아가거나, 남들 하는 것에 혹하여 따라하는 쉬운 것 대신에 말이다.

세상에는 자신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남들을 깎아내리기 바쁜 스무살이 있다. 이제 알만한 건 다 알고 웬만한 건 다 겪어봤다는 눈을 감아버린 서른 살도 있다. 스스로가 젊고 열정적이라고 자부하며 남 가르치기에만 열심인 마흔 살도 있다. 자신이 틀릴 리가 없다며 남탓으로 외로움과 열등감을 달래는 쉰살도 있다. 소통을 사랑한다면서도 쓴 소리 앞에서는 붉어진 얼굴로 귀를 틀어막는 예순살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겁내고 혐오하는 속 좁은 나도 있다. 변해가는 와중에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지 않고, 하던 대로 한 탓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 탓이다.

우스운 일이다. 더 넓은 세상에 나왔는데, 오히려 더 좁은 사람이 되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다. 나이를 먹었는데, 현명해지기는커녕 더 편협해지다니 정말 우스운 나다.

이대로 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더라도, 가끔은 청바지를 입는 날도 있을 거다. 아부지, 어머니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다가도 전처럼 반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게 면바지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 한, 우리집에 서먹함을 감수해서라도 높임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한 전과 같지는 않을 거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 주변에서 “너는 매번 청바지만 입고 다니냐?” 할 때,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한번쯤 생각을 해봤더라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변하는 것들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지 않고, 편하다고 자리에 눌어붙어 앉지 않았더라면 정말 좀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 된다. 그리고 청바지 대신 면바지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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