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편지

by 서량 김종빈

잘들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사실 잘 모르는 일, 낯선 상황들을 겪다보니 기분은 일 년은 지난 듯합니다. 지난 시간들이 쉽사리 묻혀버리는 일상을 살아서겠지요.

요즘 저는 이상한 병에 걸렸습니다. 머릿속에서 내레이션 같은 게 들리는 병입니다. 출근할 때, 밥을 먹다가도, 야근을 하다가도, 수많은 직장인들 틈바구니에 섞여 커다란 건물에 들어설 때, 좁디좁은 문을 열고 고시원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물건을 살 때, 혼자 벤치에 앉아 하드를 먹을 때, 그 외에도 어떤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내레이션이 들리는 거죠.

오늘도 그랬습니다. 어린이날이라서 그런지 회사로 걸어오는 내내 한산하더군요. 비가 몇 방울 떨어지고, 젖은 공기는 도로 위로 흘렀지요. 그런 순간이면 어김없이 내레이션이 들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시가 된다. 또는 드라마가 된다. 몇 번을 고쳐 쓰는 시가 있다. 똑같은 장면을 수십 번 찍는 드라마도 있다. 우리가 지루하다, 괴롭다 생각하며 버티어가는 순간들은 그런 것들이다. 몇 십번, 혹은 몇 백번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명장면이 만들어지듯 우리 또한 그렇다.”

저는 요즘 도통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머리 위로 비행기만 지나가도 설레었는데 말이죠. 아마도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악어와 논다거나, 빙산을 오른다거나, 사막을 걷는다던가 같은 장면들은 말입니다.

아마 저는 이제 수백 번의 출근길 장면을 찍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사사람들과 식사하는 장면, 가족들과 거실에서 늘어져 있는 장면, 야근하고 퇴근하는 중 벤치에 앉아 혼자 하드를 먹는 장면, 그런 장면들을 수백 번 찍으면 명장면도 하나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때가 별 볼일 없는 저라도 주인공이 되는 순간일 겁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들, 그저 막막하고 걱정스러운 내일들, 그리고 그때마다 초라해지는 마음.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어쩌면 나는 내 인생에서 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할지도 몰라.’ 세상에는 멋지고 빛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버둥거렸던 것 같습니다. 뭔가 멋진 장면을 만들어보려고, 새로운 장면을 찾아다닌 거겠죠. 근데 이제 그런 장면들은 충분히 찍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좀 다른 것도 찍어보려고 합니다. 지루하고 평범한 명장면들 말입니다.

예전에 어떤 작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초고를 쓸 때는 마음으로 씁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몇 십번, 몇 백번을 고쳐 씁니다. 처음은 마음으로 쓰고, 그 뒤부터는 머리로 고쳐 씁니다.”

사무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꾸물거립니다. 우산도 없는데요. 오늘은 또 무슨 장면을 찍게 될까. 머릿속에 또 어떤 내레이션이 들릴지 기대가 됩니다.

지겹고 어려운 일상이 기대됩니다.

아, 아,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모두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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