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사람마다 팔자라는 게 있나 보다. 정해진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경향이랄까, 운명의 방향성이랄까.
주어진 직위가 직위다 보니 이것저것 다하는 입장이지만, 다시 또 현장 노동자가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펜대만 굴리고 키보드만 두들기는 일은 통쾌함이 좀 부족하다 싶었는데 공장에서 몸을 쓰니 이거다 싶은 기분.
밖에서 이사님이니 총괄님이니 소리를 해주시며 새파랗게 어린 나를 높여주실 때마다 뭔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는데, 오래간만에 편한 기분이다. 아, 물론 몸은 편하지 않다.
예전에 몸으로 뛰는 아르바이트만 했어서 그런가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좀 들고 그냥 이래저래 좋다는 소리다.
아무튼 이곳은 지방의 공장이다 보니 외국인 근로자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정도가 대다수다. 근데 그중 한 친구의 표정이 유독 밝다. 아침에 서툰 한국어로 먼저 인사까지 하는데 꼬박꼬박 요자를 붙여가며 존대를 한다.
갑자기 "참 강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말조의 험한 소리를 들어도 주눅 들지 않는다. 제 일을 묵묵히 하며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리고 친절을 잊지 않는다.
25살의 "쫑"이라는 청년이 문득 영웅처럼 보였다. 그리고 덩달아 나 또한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덥고 찌는 현장, 매일 수십수백의 짐을 나르고 쌓아야 하는 곳, 사람들은 지쳐서 멍해지기까지 하는 곳에서 친절이 가지는 의미는 인품 그 이상의 것이었다.
삶이 힘들어지고, 마음이 바스러지는 곳곳에서 영웅들은 이렇게 탄생한다. 자신의 마음도 추스르지 못해 세상이 기울어가는 중에도 다른 이의 마음까지 들쳐업고 씨익 웃는 영웅들.
오늘 나는 어린아이 마냥 그를 흉내 냈다. 영웅이 되고 싶어서, 무턱대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본다. 내 마음 하나 간수 못하는 나라도, 보자기를 둘러매고 슈퍼맨을 흉내 내듯 친절한 사람을 흉내 내었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이사님이니 뭐니 소리를 듣던 날보다 더 괜찮은 하루였던 것 같다. 조금 강해진 기분마저 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