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낮에 젖은 양말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젖었고, 우산은 세 번이나 뒤집혔다. 버스는 내 앞에서 서는 척하다가 문을 닫았고, 편의점 계산대에서는 카드가 두 번 튕겼다. 영수증 끝이 젖어 잉크가 번졌다. 오늘은 내가 먼저 포기하고 싶은 날이었다. 골목 입구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그때, 저쪽 끝에서 간판 하나가 깜빡였다.
행운 수선소.
글자가 빗물 속에서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간판 아래 유리문에는 작은 종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한 걸음을 떼었고, 그 한 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미끄럽던 바닥이 그때만은 마르기라도 한 듯.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는 바늘이 책상을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눌러 붙은 숨을 털어내듯 문을 밀었다. 종이 짧게 흔들렸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뒤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칼은 젖어 있지 않았는데, 눈빛만은 비 오는 창가처럼 차분했다. 실타래와 병들이 선반 가득 놓여 있었고, 작은 유리병 안에는 네잎클로버, 말린 꽃잎, 깨진 조개껍데기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진 달력 한 장이 벽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빗물을 닦아낸 걸레가 구불구불 놓여 있었다.
“여기… 진짜 가게예요?”
“맞습니다.” 그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오늘은 어떤 행운이 고장 났나요?”
나는 한숨을 삼켰다. 가방 지퍼가 내려가며 동전 몇 개가 굴러 떨어졌다. 하나는 매트 사이로 사라지고, 하나는 내 발끝에 닿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동전을 주웠다. 동전은 의외로 따뜻했다.
“행운도… 고장이 나요?”
“다 고장이 나지요.” 그는 서랍을 열어 작은 돋보기를 꺼냈다. “사람 마음부터, 타이밍, 우연, 기대. 다 고장 납니다. 수리는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무슨 조건이라도 있어요?”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는 유리병 하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병 입구에는 종이 라벨이 붙어 있었고, 그 위에 난로에서 말린 듯한 꽃잎이 한 장 얹혀 있었다.
“이 병은 뭐예요?”
“접수함입니다. 오늘 당신의 이유를 한 줄로 적어 넣어 주세요.”
나는 멍하니 병을 보았다. 이유. 오늘은 안 꼬였으면 해서,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삼켰다. 그 말은 너무 금방 떠오르는 말이었다. 너무 흔해서, 너무 힘이 없어서.
“그냥… 오늘은 좀 괜찮았으면 해서.”
“그 ‘그냥’이 제일 비쌉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마치 날씨 이야기처럼 담담했다. 나는 발끝을 모았다. 바닥의 물자국이 느리게 마르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조금 더 구체적이면 좋습니다.” 그는 펜을 건넸다. “누구에게, 무엇을, 왜. 누구를 먼저 살리고 싶은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왜 오늘이어야만 하는지.”
“그런 걸… 적는다고 되나요?”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합니다.” 그는 실톱을 들어 빛에 비추어 보았다. “하지만 적어야 움직입니다. 이유가 당신을 끌고 갑니다.”
나는 펜을 쥐었다. 검은 잉크가 종이 위에 얇게 흘렀다. 단어들이 내 손을 맴돌다가 도망갔다. 바깥에서 빗소리가 한 번 크게 몰아쳤다가, 멀어졌다.
“잠깐만요.”
나는 펜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반 위 유리병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 버스’, ‘고백의 타이밍’, ‘면접장에서 묻지 못한 질문’, ‘잊어버린 반지’, ‘아침에 일찍 눈뜨기’, ‘늦지 않기’, ‘늦을 용기’. 누군가의 하루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같았다.
“이 병들은… 다 누군가의 이유예요?”
“그렇습니다. 다만 남의 이유를 그대로 쓰면 안 좋아요.”
“왜요?”
“몸에 맞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운은 다른 사람의 체온으로 만들어졌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조금 시큰했다. 오늘 아침, 현관에서 신발끈이 끊어져 다른 신발을 꺼내느라 버스를 놓친 일. 낮에 보낸 메시지에 답이 오지 않아 괜히 세 번째 메시지까지 지웠던 일. 편의점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나왔는데 과자를 하나 계산하지 않아 종업원이 뛰어와 내 어깨를 콕 건드리던 일. 사소한 일들이 모여 이상하게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작은 것들은 작아서 더 오래 남는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나를 조금 더… 먼저 불러주는 하루였으면 좋겠어요.”
그가 펜 끝을 들어 내 눈을 보았다.
“먼저 불러주는 하루.”
“네. 늘 마지막이라고 느껴졌거든요. 대기표 마지막 번호, 버스 문이 닫히고 난 뒤의 사람, 회의 끝에 남는 의자. 줄 끝에서 손 흔드는 사람 말고, 한 번쯤 먼저 이름 불리는 사람이고 싶은… 그런 하루.”
그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비가 창틀에 부딪히다 멈추는 소리가 났다.
“좋습니다.” 그는 접수 라벨을 새로 꺼냈다. “오늘 고치는 건 ‘순서’입니다.”
“순서요?”
“네. 순서는 버릇이 되거든요. 자주 마지막에 서다 보면 마지막이 편해집니다. 오늘은 한 걸음 옆으로 서 보는 걸로 시작하죠. 정류장에서, 일어설 때, 말 걸 때. 아주 작은 한 걸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펜이 내 손에 돌아와 있었다. 종이 라벨 위에 천천히 적었다.
‘오늘은 나를 먼저 부르는 하루.’
그가 병 뚜껑을 열고 라벨을 접어 넣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유리와 종이가 마주치는 소리.
“이제 수리를 시작할게요.”
그는 수선대 위에 작은 네잎클로버 부적을 올렸다. 부적의 한 잎이 미세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돋보기를 쓴 채 바늘로 엽맥을 따라가듯 살폈다. 숨소리가 얇아졌다. 나는 그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손끝은 서두르지 않았다.
“얼마나 걸려요?”
“크게 아닌 건 금방 됩니다.”
“크게는요?”
“마음이 오래 걸립니다.”
나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유리문 종이 작게 울렸다. 뒤늦게 들어온 바람이 문틈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 밤 하나, 서비스로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서비스요?”
“네. 첫 손님에게는 가벼운 수리를 한 번. 대신 다음에 올 때는 이유를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알겠어요.”
그는 바늘을 내려놓고 작은 병을 하나 건넸다. 투명한 액체가 절반쯤 차 있었고, 병 옆면에는 얇은 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건 뭐예요?”
“들고 나가서 정류장에서 한 걸음 옆으로 서세요. 병을 살짝 흔들고, 마음을 조용히 하세요. 오던 자리에 서지 말고.”
“그게 전부예요?”
“네.” 그는 짧게 미소 지었다. “순서는 버릇입니다.”
나는 병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 속에서 병이 딸깍 하고 가볍게 부딪혔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펴졌다.
“계산은…?”
“오늘은 접수만 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네. 다음에는 이유를 더 들려주세요.”
가게를 나서며 종이 다시 울렸다. 빗줄기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골목 끝로 향하는 길, 나는 정류장까지 빠르게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늘 서던 자리보다 한 걸음 옆. 발끝이 낯선 자리를 밟았다. 가방 속 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주 미세한,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가 났다.
숨을 고르는 동안,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서서히 다가왔다. 버스 번호가 빗물 속에서 또렷해졌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타세요.”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낯선 목소리였지만, 부드러웠다. 나는 반걸음 먼저 올랐다. 발끝이 계단을 촉촉하게 밟았다. 손잡이가 생각보다 따뜻했다.
창밖 골목 끝, 간판이 한 번 더 깜빡였다. 행운 수선소.
나는 손에 남은 빗물을 털어내며 마음속으로 짧게 적었다. 오늘은 나를 먼저 부르는 하루.
버스가 움직였다. 흔들리는 창에 내 얼굴이 겹쳤다. 낯설었다. 나쁘지 않았다. 문득, 가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또렁거렸다.
이유를 들고 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번엔,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