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유의 가격

by 지구 외계인

다음 날, 비는 그쳤다. 대신 바람이 날카로웠다. 정류장에서 한 걸음 옆으로 서는 버릇이 금세 몸에 배었다. 엉겁결에 앞을 내주던 발이, 아주 조금 먼저 나갔다. 그 한 걸음 덕분인지, 오전 내내 일들이 맞물려 돌아갔다. 놓칠 뻔한 통화를 건졌고, 분실물도 금세 찾았다. 작은 기적들이 습관처럼 따라왔다.

점심 무렵, 나는 다시 골목으로 갔다. 간판은 낮빛 속에서도 한 번 또렷이 반짝였다. 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어제와 같은 냄새, 같은 온도. 다른 것은 내 마음뿐이었다.

“다시 오셨네요.”

“약속했잖아요. 이유를 더 들려 달라고.”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선대 위에는 작은 칠판이 세워져 있었다. 어제는 없던 물건이었다. 분필로 적힌 글씨가 어지러웠다.

이유의 가격

그냥 오늘만 안 꼬이면 좋겠다 — 매우 비쌈
그래도 오늘은 늦지 않고 싶다 — 보통
내가 먼저 인사하고 싶다 — 가벼움
그 사람의 용기를 지키고 싶다 — 할인
남의 문장을 베껴 왔다 — 수리 불가
거짓말 — 반납 불가, 저주 위험

나는 칠판을 읽고 있다가 웃음이 비어 나왔다.

“진짜 표처럼 적어 놓으셨네요.”

“자꾸 물어보셔서요. 가격표가 있으면 마음들이 좀 덜 흔들리거든요.”

“그럼 저는… 어제는 서비스였으니까, 오늘부터는 결제해야겠네요.”

“결제는 이유로 하시면 됩니다.”

“돈은 안 내요?”

“돈은 나중에 내는 게 낫습니다. 마음보다 늦게 오거든요.”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선반에서 얇은 접수지를 꺼냈다. 접수지 윗줄에는 네모칸이 있었다. 이름을 쓰라는 뜻인가 싶어 펜을 들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안 받습니다. 오늘의 이유만.”

“그냥… 오늘도 괜찮았으면—”

“그 ‘그냥’이 제일 비쌉니다.”

그 말이 방 안의 공기를 조금 흔들었다. 나는 펜끝을 들고 멈췄다.

“왜 그렇게 비싸요? 제일 흔한 말인데.”

“흔해서요. 잡아당기는 방향이 없거든요. 주워 담을 그물도 없고. ‘그냥’은 모든 길을 향하고, 그래서 어떤 길로도 가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싸져요?”

“모양을 정하시죠. 오늘의 행운이 닿을 자리, 닿지 말아야 할 자리. 그 사이 경계를 그으면 가격이 내려갑니다.”

그는 칠판 밑줄에 작은 글씨를 덧댔다.

모양이 또렷할수록 싸짐
남을 먼저 살릴수록 더 싸짐
오래 쥘수록 비싸짐
짧게 나눌수록 싸짐

그때 문이 열렸다. 종이 짧게 울리고, 어제 봤던 청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깨에 작은 꽃다발이 걸려 있었다.

“사장님, 오늘… 저, 고백하려고요.”

“좋습니다. 이유는요?”

“저 사람이, 늘 뒤에서 웃어 주는 사람이라서요. 나도 한 번 먼저 웃어 주고 싶어요.”

주인장이 손가락으로 윗줄을 톡톡 쳤다.

“이유의 가격, 할인.”

청년이 나를 흘긋 보고 웃었다. 내 입에서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고백 잘되면, 나중에 조금 나눌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청년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주인장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섰다.

“보셨죠? 모양이 분명하면, 저절로 움직입니다.”

“근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유가 너무 길면요? 복잡하면?”

“길다고 값이 오르진 않습니다. 길기만 하고 중심이 없으면 오를 뿐이죠. 긴 이유 속에는 보통 한 줄이 숨어 있어요. 그 한 줄을 찾으면 됩니다.”

“한 줄…”

“어제는 ‘먼저 불러주는 하루’였죠. 오늘은요?”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아침의 작은 장면들이 빠르게 스쳤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손을 내밀어 잡아주던 누군가의 손, 편의점 계산대에서 먼저 줄을 양보하던 작은 목소리, 벤치에 나란히 앉아 햇빛을 나눠 앉던 두 사람. 그 사이에 끼어 있던 나.

“오늘은…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 하루요.”

“좋네요. 망설임을 줄이는 건 손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근력입니다.”

“근력은 어떻게 길러요?”

“가벼운 무게로 오래. 그러려면 작은 성공을 자주 경험해야 하죠. 그러니 작게 부탁하는 게 좋습니다.”

그는 서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어제와 모양이 달랐다. 병 입구에 얇은 실이 감겨 있었다.

“이건 ‘잠깐의 용기’ 병입니다. 아주 잠깐, 한 문장 길이로 용기가 나옵니다.”

“약 같네요.”

“약이 아닌 건 없습니다. 말도, 물도, 손도. 다 약이 됩니다.”

나는 병을 받아 들었다. 액체는 투명했고, 냄새는 거의 없었다. 병 옆면에는 새끼손톱만 한 표시가 있었다.

“이 표시까지 딱 한 번만. 너무 많이 쓰면 떨림이 와요.”

“떨림이요?”

“용기에는 떨림이 섞여 있어야 자연스럽습니다. 떨림이 없는 용기는 보통 무리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은 다시 칠판에 분필을 대었다.

추가 안내
망설임 줄이기 — 가볍게 싸짐
결정 미루기 — 슬며시 비싸짐
다른 사람 먼저 세우기 — 크게 할인
남을 밀쳐 세우기 — 수리 취소

“그럼 오늘의 결제는…”

“이유를 적고, 적용하시면 됩니다.”

그는 접수지를 내밀었다. 나는 펜을 들고 천천히 한 줄을 썼다.

오늘은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다.

접수지를 병에 넣는 소리가 났다. 어제와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단단한 소리였다. 주인장이 수선대 위에 네잎클로버 부적을 올려 두고, 얇은 바늘로 갈라진 결을 따라갔다.

“혹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유가 틀리면요? 쓰면서도 자꾸 바뀌면?”

“틀린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덜 맞는 이유가 있을 뿐이죠. 오늘의 이유는 오늘을 겨우 견디기에 딱 좋으면 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이유를 쓰면 되고요.”

“그럼 매일 와도 돼요?”

“매일 와야 안 올 날을 배웁니다.”

우리는 잠깐 웃었다. 그때 문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들어왔다. 막차를 늘 놓치던 그 사람. 오늘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사장님, 어제 알려주신 자리. 한 걸음 옆으로 섰더니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들이 먼저 길을 터 주더라고요.”

“좋습니다. 오늘의 이유는요?”

“저도 오늘은 다른 사람 길 한번 먼저 터 주고 싶습니다.”

주인장은 분필로 칠판 옆 빈칸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보세요. 이유는 돌아옵니다. 먼저 준 길이 돌아와서 자기 길을 넓히죠. 이럴 땐 가격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선반에 올렸다.

“이건… 그래도 받아 주세요. 어제 밤, 맥주를 한 캔 덜 마셨습니다.”

“그럼 동전 하나만 받겠습니다. 맥주 한 캔 분의 마음을 남겨 두세요.”

아저씨가 웃었다. 모자 챙 아래 눈가가 접혔다.

손님들이 나가고,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주인장은 내 접수병을 가리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저 병은 저녁쯤 효과가 올 겁니다. 단, 망설임이 올 때 병을 먼저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숨. 그 다음 한 걸음. 그 다음 병입니다.”

“순서가 있군요.”

“모든 수리는 순서로 돼 있습니다. 마음도, 행운도.”

나는 병을 가방에 넣었다. 어제보다 가방이 덜 무거웠다. 문을 열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사장님은… 본인 이유는 뭔데요?”

그가 잠깐 멈췄다. 바늘 끝이 공중에서 작게 빛났다.

“나는… 오래 미뤄 둔 질문 하나에 답하려고 합니다.”

“무슨 질문인데요?”

“내가 가진 손의 기술이, 나만 살리는 건지 모두를 살리는 건지.”

“오늘의 이유는요?”

“오늘은… 내 기술이 나를 조금 덜 가리게.”

나는 그 말을 주머니처럼 쓸어 담았다.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바깥빛이 방 안으로 들었다가, 다시 밖으로 흘렀다.

골목을 걸어 나오며 나는 내 한 줄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더듬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다. 말로만 반복하니 여전히 종이 위 문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연습을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발을 내미는 순서를, 가게 문 앞에서 손잡이를 먼저 잡는 동작을, 편의점 문턱에서 내 뒤 사람을 먼저 보내는 순간을. 이상하게도 모든 게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저녁이 가까울 무렵, 메시지 하나가 왔다. 오래 답을 기다리던 그에게서였다.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 어제 못한 얘기가 있어서요.

손끝이 찌릿했다. 망설임이 문턱처럼 눈앞에 올라왔다. 나는 가방 속 병을 떠올렸다. 하지만 먼저 숨. 그 다음 한 걸음. 병은 마지막.

나는 크게 들이쉬고, 아주 짧게 내쉬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문장을 썼다.

괜찮아요. 오늘은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보내고 나서야 병을 꺼냈다. 작은 표시까지 액체를 흔들어 입안에 적셨다. 맛은 없었다. 대신 따뜻함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떨림이 가볍게 섞였다. 그 떨림이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밤이 내려앉을 때, 골목 끝 간판이 또 한 번 반짝였다. 나는 마음속 가격표를 떠올렸다. 그냥이라는 말이 제일 비싸다. 그래서 나는 그냥을 줄이고, 오늘의 한 줄을 늘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가, 내가, 조금씩 싼 마음이 되길 바라면서.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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