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맑았다. 빗자국은 말라 있었고, 하수구에는 밤새 굴러 들어간 낙엽이 겹겹이 쌓였다. 정류장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자 발끝이 먼저 기억을 꺼냈다. 늘 서던 자리에서 한 걸음 옆. 나는 그대로 섰다. 어제 병을 흔들 때 들리던 작고 마른 소리가 문득 귓가에 되살아났다.
“오늘은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다.”
그 문장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버스가 한 대, 예상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다. 타야 할 번호였다. 보통이라면 앞사람들의 어깨 사이에서 빈틈을 찾다 문이 닫히곤 했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고, 한 걸음 더 옆으로 비켰다. 정류장 바닥의 흰 선이 발 아래로 미끄러졌다.
버스가 서서히 멈췄다. 문이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열렸다. 내가 먼저 보였다. 운전기사가 눈을 맞추며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먼저 타세요.”
나는 계단을 올랐다. 발바닥 아래 고무의 탄력이 느껴졌다. 손잡이가 따뜻했다. 늘 마지막 계단에서 들리던 “닫겠습니다” 대신, “천천히요”라는 목소리가 뒤에서 흘렀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바닥을 톡 치는 소리가 났다. 동전 하나가 굴러와 내 발끝에 멈췄다. 어제 매트 사이로 사라졌던 그 크기, 그 빛. 나는 허리를 숙여 집었다. 손에 올려 보니 이상하게도 미지근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거… 당신 거예요?”
옆자리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건너편 아주머니도 손을 저었다.
“그럼 오늘은 제 것이네요.”
나는 웃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창문 밖으로 햇빛이 스쳤다. 어제의 문장이 손바닥에서 살아 움직였다. 작은 기적이 한 번 미끄러진다. 그렇게 사소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회사 근처에서 내릴 때, 나는 동전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돌아올 때까지 잃지 않게, 심장 옆에. 아침의 작은 변화가 하루의 줄기를 바꾸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문을 나서기 전, 나는 다시 내 문장을 속으로 말했다.
“망설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에 타려던 사람이 반걸음 물러섰다. 나는 본능처럼 손을 들어 “먼저 타세요”라고 하려다가, 조용히 한 걸음 들어섰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의 미소였다. 자리에서도 나는 늘 뒤쪽, 벽 가까이에 앉던 버릇을 바꿨다. 복도 쪽 칸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렸다. 목이 앞을 보았다.
오전 업무는 별 탈 없이 흘렀다. 메일 답장이 평소보다 덜 튀었고, 전화도 끊기지 않았다. 점심시간, 빵집 앞에서 사람들 줄이 흐트러졌다. 나는 누가 먼저 줄을 세워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입을 열었다.
“저쪽 끝이 마지막이었어요. 여기부터 서면 될 것 같아요.”
나보다 머리 하나 큰 남자가 가볍게 엄지를 들어 올렸다.
“좋네요. 오늘 줄이 예쁩니다.”
자꾸 이런 말들이 나왔다. 마음을 꺼내 놓았다기보다, 마음의 모양이 말의 모양을 정하는 느낌.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의 모양을 길게 바라보았다. 둥글지도 네모나지도 않은, 물방울 같은 것. 늘 흘러 내려 마지막 자리에 고이는 모양. 어쩌면 나는 그동안 마지막이라는 연못을 내 손으로 파고 있었던 걸까.
오후, 기다리던 메시지의 주인공을 만나러 나갔다. 골목 카페의 문을 열자 종이 울렸다. 반대편 테이블에서 그가 일어섰다.
“먼저 왔네요.”
“네. 오늘은 제가 먼저 오기로 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나는 입술을 적셨다. “아니요. 그냥은 아니고, 이유가 생겼어요.”
그는 웃었다. “듣고 싶네요.”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행운 수선소의 구체적인 것들은 비밀처럼 입안에서 녹아 사라졌다. 대신 나는 내가 요즘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을 말했다. “내가 언제 자꾸 망설이는지”, “어느 자리가 익숙한지”, “한 걸음 옆으로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망설이지 말고, 내가 먼저 말할게요. 어제 못한 얘기. 나, 이 일 그만둘지도 몰라요.”
“왜요?”
“계속 뒤에만 서 있는 느낌이라서요. 내가 한 일 같지가 않거든요.”
그 말이 심장 쪽 주머니의 동전을 건드렸다. 나는 손으로 주머니를 한번 눌렀다.
“그럼 오늘, 당신 차례요. 망설이지 말고 하려던 말을 해요.”
그가 한숨을 쉬다가 웃었다.
“그래요. 그럼, 부탁 하나. 만약 내가 그만두면, 나를 마지막에 보지 말아 주세요.”
“어떻게 보면 마지막이 끝이니까요.”
“아니요. 다른 시작일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말을 마치고 일어설 때, 나는 의자 다리를 바닥에서 살짝 떼었다 놓았다. 거슬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습관. 그 작은 움직임이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마음의 모양이 몸짓의 모양을 바꾸는 순간.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동전이 자꾸 굴렀다. 정류장에 서서 동전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보았다. 햇빛이 동전의 가장자리를 얇게 태웠다. 나는 동전을 두 손 사이에 넣고 살짝 비볐다. 어제 수선대 위에서 주인장이 엽맥을 따라가던 손놀림이 떠올랐다. 그때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행운은 마음의 모양을 닮아 커집니다.”
나는 그 문장을 입 안에서 다시 굴렸다. 마음의 모양. 그러니까 마음이 넓으면 행운도 넓어지고, 마음이 날카로우면 행운도 자꾸 베어지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투명하면 행운도 빛을 통과시킬까. 알 듯 말 듯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행운이 커지는 방향이 밖이 아니라 안쪽에서 시작된다는 것. 내가 먼저 나를 먼저 불러 줄 때, 바깥의 작은 것들이 따라온다는 것.
버스가 또 늦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길게 빼고 도로를 들여다봤다. 웅성거림 사이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 버스는 매번 늦네.” 나는 그 말 뒤로 길게 이어지는 분위기가 싫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장난을 했다. 가방에서 물티슈 한 장을 꺼내 정류장 안내판 가장자리의 묵은 얼룩을 문질렀다. 뜻밖에도 쉽게 지워졌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일,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일, 그러나 자리를 조금 밝게 만드는 일. 그런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을 버티는 것. 마음이 덜 줄어들었다.
버스가 마침내 도착해, 이번에도 내 앞에 문을 멈췄다. 탄 뒤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좌석 아이가 캔디를 떨어뜨렸다. 캔디가 좌석 밑으로 굴러갔다. 아이가 손을 넣다가 포기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제가 잡아 줄게요.”
손끝에 플라스틱의 매끈함이 닿았다. 나는 캔디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 말이 동전보다 더 가벼웠다. 나는 주머니 속 동전을 다시 움켜쥐었다. 이제 이 동전은 더 이상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증표가 아니었다. 마음이 만든 작은 모양의 쇳조각, 오늘을 기념하는 작은 무게.
해질 무렵, 골목 입구를 지나는데, 행운 수선소 간판이 낮빛 속에서도 짧게 깜빡였다. 마치 턱짓으로 불러 세우는 느낌. 나는 문 앞까지 갔다가 그대로 서 있었다.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은 접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주인장이 말했듯, 매일 와야 안 올 날을 배운다. 나는 오늘의 모양을 나 혼자서 끝까지 굴려 보고 싶었다.
문 앞에서 뒤돌아설 때, 유리문 너머로 실과 바늘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났다. 그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 멈췄다. 나를 불러 세우는 듯하면서도, 보내는 듯한 소리. 나는 작게 목을 풀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옆에 작은 종이 한 장을 놓고, 펜으로 한 줄을 썼다.
마음의 모양을 그려 본다.
원, 반달, 물방울, 사다리꼴… 여러 모양을 그리다가, 결국 점 하나를 찍었다. 한 걸음 옆으로 선 자리처럼, 단단한 점 하나. 내일의 마음 위에 얹을 작은 못 같은 것.
잠을 청하기 전에 창문을 열었다. 밤 공기가 다가왔다. 어제와 달리 비의 냄새가 아니었다. 먼지 냄새도 아니었다. 뭐랄까, 빈 컵에 물 한 모금 따라 놓은 냄새.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문장을 한 번 더 읽고 불을 껐다.
행운은 마음의 모양을 닮아 커집니다.
그 문장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부풀었다. 내 심장과 같은 속도로. 내일이면 또 다른 모양을 가질지도 모른다. 괜찮다. 오늘은 오늘의 모양으로 충분하다. 작은 기적이 미끄러지는 동안, 나는 그 기적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얇은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