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by 지구 외계인

오전 햇빛이 골목 끝까지 밀려왔다가, 수선소 유리문 앞에서 한 번 부드럽게 꺾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종이 울렸다. 주인장은 이미 수선대 앞에 앉아 있었다. 얇은 바늘이 손끝에서 반짝였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냥… 아니죠. 오늘은 연습하려고요. 망설임 줄이는 법.”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손님 오시면 먼저 말을 붙여 보세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또 울렸다. 어제 보았던 청년이었다. 어깨에 작은 꽃다발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꽃잎 몇 장이 길에서 살짝 눌린 듯 구겨져 있었지만, 마음은 더 또렷해 보였다.

“사장님, 저… 오늘 고백하려고요. 근데 발이 자꾸 뒤로 가요.”

내가 먼저 말했다.

“꽃, 예쁘네요. 누구에게요?”

청년은 순간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 같이 봉사하던 친구예요. 늘 맨 뒤에서 정리해 주던 사람.”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요?”

“그 사람이 늘 뒤에서 웃어 주는 사람이라… 저는 오늘 앞에서 먼저 웃어 주고 싶어서요.”

나는 옆의 작은 칠판을 가리켰다.

“이유의 가격표 보셨어요? 남을 먼저 세우면 크게 할인.”

청년이 칠판을 빠르게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싸게 해 주세요.”

주인장이 서랍에서 반듯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말문 카드를 드릴게요. 첫 문장만 열어 주는 카드입니다. 그 다음은 당신 말로 채우셔야 해요.”

“첫 문장… 뭔가요?”

“그건 당신 목소리로 나와야 하죠. 다만 카드를 손에 쥐면 입술이 덜 마릅니다.”

청년이 카드를 쥐었다 폈다.

“듣기만 해도 덜 마르네요.”

나는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시간은 정했나요?”

“해 질 때쯤, 강변 벤치요. 바람이 적당할 때요.”

주인장이 수선대에서 얇은 고리를 하나 꺼내 꽃다발 줄기에 살짝 걸어 주었다.

“이건 꽃에게 주는 지지대예요. 너무 흔들리면 말도 흔들리거든요. 발이 뒤로 가면 손으로 살짝 줄을 쥐세요. 그럼 몸이 앞으로 와요.”

청년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성공하면… 나누러 올게요.”

“결과가 어떻든 나누러 오세요.” 주인장이 말했다. “용기는 나눌 때 다시 자랍니다.”

청년이 나가자, 방 안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잠깐 침묵을 나눴다. 곧이어 문이 다시 울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아저씨가 발을 끌듯 들어왔다. 표정은 어제보다 덜 지쳐 보였다.

“어제 알려주신 자리,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한 걸음 옆으로 섰는데 사람들이 먼저 길을 터 줘요. 오늘은… 내가 먼저 길을 터 주고 싶습니다.”

주인장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오늘은 발의 습관을 고쳐 봅시다.”

나는 아저씨 앞에 종이 테이프를 두 줄 붙였다. 하나는 정류장에서 늘 서던 자리의 너비, 다른 하나는 한 걸음 옆의 너비.

“발을 번갈아 올려 보세요. 어제의 자리, 오늘의 자리.”

아저씨가 발을 올렸다 내렸다. 그의 무릎이 천천히 풀렸다. 주인장이 발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차를 놓치는 건 발목의 길이 때문일 때가 많아요. 걸음이 약간 뒤로 걸려 있거든요. 오늘은 발목을 앞으로 조금 더 밀어 줍시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이 가게가 있죠.”

나는 수선대 아래에서 얇은 열쇠고리 하나를 꺼냈다. 고리 안쪽에 작은 금속판이 달린 물건이었다.

“이건 ‘지연 금지’ 부적이에요. 딸깍 소리를 내 주는 판이에요. 발이 망설일 때 손으로 한 번 딸깍. 생각보다 바로 나가집니다.”

아저씨가 부적을 쥐고 웃었다.

“그럼 오늘은 제가 먼저 길을 터 줄게요. 누가 어깨를 조금만 뒤로 빼면, 제가 앞으로 한 발.”

“좋습니다.” 주인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은 막차를 타려고 하지 말고, 한 대 전 버스를 생각하세요. 그 생각만으로도 시간의 모양이 달라져요.”

아저씨의 눈이 둥글어졌다.

“이야… 시간에도 모양이 있군요.”

“있습니다. 늘 마지막을 생각하면 시간이 줄어들고, 하나 앞을 생각하면 시간이 늘어납니다.”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선반에 올렸다.

“오늘은 진짜로 아무것도 안 사도 되겠지요?”

“되죠. 대신 길을 하나 사세요. 누군가에게.”

아저씨는 웃으며 부적을 주머니에 넣었다. 모자 챙 아래로 맑은 눈빛이 언뜻 비쳤다.

두 손님이 연달아 지나가자, 문은 한동안 조용했다. 주인장은 바늘을 놓고 커다란 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병 안에는 색이 다른 작은 조각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뭐예요?”

“나누고 간 행운의 찌꺼기들이에요. 말로 다 쓰고도 조금 남는 것들.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모이면 따뜻해져요.”

나는 병 표면에 이마를 살짝 댔다. 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문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화사한 스카프를 맨 이모가 들어왔다. 표정은 밝은데, 눈썹 사이가 약간 모아져 있었다.

“사장님, 저… 웃지 마세요. 로또 2등을 두 번 놓쳤어요.”

나는 먼저 웃음이 나오는 걸 조금 늦췄다.

“두 번이나요?”

“두 번이나요! 같은 번호를 꾸준히 샀는데, 한 번은 하나가 위로 갔고, 한 번은 하나가 아래로 갔고. 딱 한 칸 차이로요.”

주인장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 번호를 고르셨나요?”

“가족 생일이랑, 우리 집 전화번호 앞자리.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숫자. 그러니까… 이유가 많죠?”

“많습니다. 그래서 흐립니다. 숫자에 물기가 많으면 미끄러워요.”

이모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아니 근데, 제가 계속 그 번호를 사는 이유는 하나예요. 그 번호를 고른 날,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그냥 버리기가 싫었어요.”

“좋습니다. 그럼 오늘의 이유는 그 ‘좋은 일’이네요. 정확히 무엇이죠?”

“아들이 집에 먼저 들어와서 밥을 했어요. 그날 처음으로요. 그게 너무 좋아서, 그날 번호를 그냥… 기억하고 싶었어요.”

나는 칠판 옆 여백에 하나를 적었다.

좋은 일을 기억하려고, 같은 번호를 고른다.

주인장이 손가락으로 그 문장을 가볍게 톡 쳤다.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로또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있겠죠. ‘좋은 일’의 모양을 숫자로만 남기지 말고, 오늘의 행동으로 남겨 보세요.”

“어떻게요?”

“아들이 먼저 밥을 했던 날처럼, 오늘은 당신이 먼저 차 한 잔을 내어 보세요. 그때의 마음을 현재로 불러오는 겁니다. 그리고 복권은… 아예 사지 말라곤 안 하겠습니다. 다만 오늘은 ‘한 장 덜 사기’로 나누어 주세요. 그 한 장값은 여기 두고 가시고요.”

이모가 지갑을 열었다가 웃었다.

“한 장값만 두고 가라고요? 너무 착한 장사네.”

“우리는 수선소입니다.”

나는 선반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이모에게 건넸다. 봉투 겉면에는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오늘의 기억을 현재로
좋은 일을 먼저 만든다

“봉투 안에는 아주 얇은 냄비받침이 들어 있어요. 뜨거운 것을 내려놓을 때만 쓰세요. 뜨거운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

이모가 봉투를 꼭 쥐었다.

“그럼 오늘은 복권 한 장 덜 사고, 아들에게 차를 먼저 내고, 냄비받침을 식탁 가운데에 놓겠습니다.”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내일의 행운은 오늘의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모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그 말, 참 좋네요. 내일을 사려면 오늘의 이유로 결제한다. 알았어요. 내일도 올게요. 근데 다음엔 3등 얘기 들려줄게요. 너무 2등만 얘기하면 재미없잖아요.”

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길게 남았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서랍 속 바늘들이 서로 닿는 소리만 작게 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방의 온도가 달라져요.”

“그렇죠. 이유는 온도입니다. 각자의 온도가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가요.”

나는 오늘 만난 세 사람의 이유를 마음속에 나란히 세워 보았다. 먼저 웃고 싶다. 먼저 길을 터 주고 싶다. 좋은 일을 현재에 불러오고 싶다. 세 문장 사이에 얇은 다리가 놓였다. 다리 위로 작은 기적들이 미끄러졌다.

주인장이 커다란 병을 다시 들어 올려 내게 건넸다.

“들어 보세요. 무겁죠?”

나는 두 손으로 병을 받쳤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바닥의 작은 조각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나눈 것들이 모이면 따뜻해지고, 따뜻해지면 무거워집니다.”

“무겁다고 나쁜 건 아니군요.”

“아니죠. 들 수 있을 만큼만 무거우면 됩니다. 그게 오늘의 한계고, 내일의 시작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종이 아주 잠깐 떨렸다. 주인장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오늘의 이유, 한 줄.”

나는 가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동전 가장자리가 햇빛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문장을 연다.

주인장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 문장은 방의 온도를 덜 흔들고, 사람을 먼저 보게 하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로 골목의 밝기가 달라졌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손님일까. 종이 울렸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늘의 연습, 오늘의 한 줄, 오늘의 이유로 결제하기. 문턱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림이 섞였지만, 충분히 맑았다.

“저… 제 행운이요. 자꾸 밖으로 새요.”

나는 숨을 고르고 웃었다.

“어서 오세요. 먼저, 왜 필요한지 들려주세요.”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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