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순서의 수선

by 지구 외계인

문을 밀자 종이 한 번 울렸다. 오늘은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주인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실타래가 손바닥에서 고요히 굴렀다.

“오늘은 어떤 이유로 오셨어요?”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가슴 주머니의 동전을 톡 만졌다. 말이 속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떠올랐다.

“늘 마지막이었어요.”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그치지 않는 눈빛이었다.

“대기표를 뽑으면 맨 끝 번호, 회의에서 발언하면 맨 마지막 차례, 버스는 문 닫고 나서야 내 앞에 서고,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면 항상 이어 붙는 사람. 줄의 끝에 서면 편했어요. 뒤에서 보살피는 척도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나는 맨 끝에 서는 연습만 하고 있더라고요.”

주인장은 손에 쥔 실을 내려놓았다. 수선대를 톡톡 두드리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 고치는 건 당신의 순서입니다.”

그 말이 방 안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는 어깨를 조금 곧게 폈다.

“순서를… 고칠 수 있어요?”

“가능하니까 이 가게가 있죠.” 그는 미소를 얹었다가 거두었다. “순서는 버릇입니다. 몸이 먼저 기억해 버린 순서, 마음이 눈치 보며 맞춘 순서, 말이 뒤따라가다 늦는 순서. 오늘은 그 셋을 함께 고칩니다.”

수선대 아래에서 그는 얇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작은 물건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손가락만 한 벽돌 조각, 은은한 소리를 내는 작은 종, 종이에 그려진 점 하나, 그리고 납작한 돌판에 새겨진 글자.

“의식이 두렵지는 않으세요?”

“두렵네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들을 차례대로 꺼내었다.

“첫째, 발의 순서. 둘째, 손의 순서. 셋째, 말의 순서. 넷째, 마음의 순서.”

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름만 들어도 정리되는 기분이에요.”

“정리는 고치는 일의 절반입니다.” 그는 바닥에 얇은 종이테이프를 붙였다. 문지방에서 수선대까지, 곧은 선 하나. 선 위에 손가락만 한 벽돌 조각을 앞뒤로 놓았다.

“발의 순서부터. 평소엔 어디에 서시죠?”

“늘 뒤쪽… 누가 먼저 지나가면 그 다음에.”

“오늘은 달라요. 이 앞의 벽돌이 ‘처음’, 뒤의 벽돌이 ‘마지막’입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발을 ‘처음’에 먼저 올리세요. 크게 딛지 말고, 얕게. 발바닥 앞쪽만 닿게.”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 발로 섰다. 얇은 탄력이 발끝에 전해졌다. 앞으로 한 발, 뒤로 한 발. 몸이 자동으로 익숙한 쪽으로 가려 할 때마다 주인장이 조용히 말했다.

“다시. 처음.”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속으로 말했다. 다시. 처음. 발이 앞을 기억하기 시작하자, 장딴지가 벌써 덜 무거웠다.

“둘째, 손의 순서.” 그는 작은 종을 내게 건넸다. 병에 붙은 라벨 같은 소리가 맑게 날 것 같았다. “이 종은 먼저 손을 드는 연습입니다. 말하기 전에, 종을 아주 잠깐 울리세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는 신호.”

“어디서 울려야 해요?”

“사람 앞이 아니라, 당신 앞에서요. 귀에만 들리게.”

나는 종을 손바닥 가운데에 올려놓고, 엄지로 살짝 건드렸다. 은빛 소리가 작게 떨렸다. 내 귓속만 알고 지나가는 소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셋째, 말의 순서.” 그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가운데에는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건… 점이네요.”

“맞습니다. 말은 때때로 줄글이 아니라 점으로 시작합니다. 오늘은 문장을 길게 준비하지 마세요. 한 점만 찍으세요. ‘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흘러나오게 두는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황한 설명이 나를 자주 늦추곤 했다. 점 하나. 한 점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넷째, 마음의 순서.” 그는 납작한 돌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짧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먼저 부름

나는 천천히 읽었다. 입안에서 글자가 한 번 굴렀다.

“이 돌판은 어디에 두면 되죠?”

“가방 가장 안쪽, 손이 제일 늦게 닿는 자리에 두세요. 그리고 매일 그 돌을 꺼내 다른 곳으로 옮기세요. 점점 앞으로. 열흘이면 앞주머니로. 그 다음 날엔 손에. 마음이 손을 제일 나중에 찾던 버릇을, 제일 먼저 찾는 버릇으로 바꿉니다.”

“열흘….”

“하루면 더 좋고요. 다만 오래된 버릇일수록 천천히 가는 것이 덜 아픕니다.”

의식은 소리 없이 시작됐다. 주인장이 선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종이테이프 위의 벽돌을 앞뒤로 옮겨 보았다. 앞의 벽돌에 발을 먼저 올리는 것만으로도 허리의 각도가 달라졌다. 종을 살짝 울리고, 종이의 점을 보고, 돌판의 글자를 다시 읽었다.

“순서를 고치면, 무엇이 먼저 달라져요?”

내가 묻자 그는 바늘을 들다 말고 답했다.

“한숨이요.”

“한숨이요?”

“늘 마지막 순서를 지키는 사람은 한숨도 뒤에서 쉬어요. 남들이 다 지나가고,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지고, 그때 쉬죠. 오늘부터는 앞에서 먼저 한 번 쉬세요. 길게 말고, 짧게. 앞숨.”

나는 앞숨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조용히 따라 했다. 앞숨. 금세 어깨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혹시, 내가 먼저 서는 것이 누군가를 밀어내는 일이라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밀어내는 건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먼저’ 서는 이유가 나를 지키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함이라면, 자리는 자연히 공간을 만듭니다.”

“자리가 공간을 만든다….”

“네. 순서는 줄을 만들지만, 이유는 공간을 만듭니다. 우리는 줄만 고치지 않아요. 공간도 같이 만듭니다.”

문이 짧게 울렸다. 한 사람이 서둘러 들어왔다가 멈칫했다. 내가 수선대 앞 선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옆으로 섰다. 나는 종을 아주 작게 울렸다. 내 귀에만 들리게. 주인장이 그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들었다.

“이제 발을 내미세요. 처음.”

나는 한 발을 내밀었다. 방의 공기가 살짝 앞으로 움직였다. 들어온 사람에게 자리를 손짓해 내어 주며 내가 말했다.

“저 먼저 접수하고 있었습니다. 금방 끝나요.”

그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말을 적게 하고도 줄의 맨 앞에서 오래 서 있지 않을 수 있었다. 앞에서 먼저 서되, 빨리 비켜주는 연습. 앞에 선 사람이 길을 막지 않는 법.

주인장이 작은 병을 꺼냈다. 병목엔 얇은 실이 감겨 있었고, 라벨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앞자리 물방울

나는 병을 들고 웃었다.

“이건 뭐예요?”

“앞자리를 오래 버티면 목이 마릅니다. 물방울은 망설임을 씻어 주지만, 자만도 함께 씻어 줍니다. 앞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기묘한 우쭐함 같은 것. 필요할 때 한 방울만.”

그는 병을 빛에 비추었다.

“많이 마실수록 뒤로 가요. 앞은 항상 목이 조금 마른 자리입니다.”

나는 병을 가방에 넣었다. 돌판은 가장 깊은 주머니에, 종은 손바닥에, 점이 그려진 종이는 가슴 주머니에. 발은 벽돌 위에서 앞뒤로 한 번 더.

“지금 당장 시험해 볼까요?” 주인장이 말했다. “밖에 줄이 길게 섰거든요. 쓰레기 수거차가 골목을 막았어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가겠다고 소리치는 중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 웃었다.

“이 동네가 원래 그렇게 급했나요?”

“행운 앞에서는 누구나 급해집니다.”

우리는 문을 열었다. 골목 입구에서 오도가도 못한 차들 사이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젊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어머니가 유모차를 흔들며 난감해했고, 배달 오토바이가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종을 손바닥에서 살짝 울렸다. 내 귀에만 울리는 소리. 그리고 점을 떠올리고 말을 꺼냈다.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유모차부터 앞으로 보내요. 그다음 오토바이, 그다음 오른쪽 차 한 대.”

사람들의 시선이 쓸려 왔다가 멈췄다. 잠깐의 정적 뒤에, 유모차를 민 어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손을 들었다. 오른쪽 차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모두 한 걸음씩 자리를 바꾸었다. 발의 순서가 골목의 순서로 번졌다. 막혀 있던 바람이 통로를 찾았다.

“좋아요. 이제 차례대로 가요.”

나는 마지막에 한 발 물러서며 길을 냈다. 내 앞숨은 이미 끝났고, 뒤의 한숨은 조금 덜 무거워졌다. 골목이 조용해지자 주인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보셨죠. 순서를 고치면 목소리의 높이도 바뀝니다. 앞에서 낮게, 뒤에서 높게. 우리는 자주 반대로 말하거든요.”

“앞에서 낮게….”

나는 주머니 속 돌판을 살짝 만졌다. 가장 안쪽에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늘 밤에는 이 돌을 더 앞으로 옮기리라. 내일이면 주머니 중간으로, 모레면 앞주머니로. 언젠가는 손에.

수선소로 다시 들어오자, 주인장은 접수병을 가리켰다.

“오늘의 이유, 한 줄.”

나는 종이 위에 천천히 썼다.

오늘은 내가 앞에서 길을 열고, 빨리 비켜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문장은 자만을 막고, 망설임을 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오래된 버릇을 아프지 않게 바꿉니다.”

나는 웃었다. 의식이 끝나자 방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바늘 끝에서 작은 빛이 났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주인장이 나를 불렀다.

“돌판은 오늘 밤 베개 옆에 두세요.”

“베개 옆이요?”

“잠들기 전에 글자를 한 번 더 읽으면, 꿈에서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누구의 이름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먼저 부를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올 때 종이 울렸다. 골목의 공기가 새로 깔리는 느낌. 발끝이 알아서 앞을 찾았다. 처음. 다시. 처음.

밤이 와서 방을 채울 때, 나는 돌판을 베개 옆에 두었다. 손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먼저 부름

눈을 감으니 낮의 골목이 떠올랐다. 유모차가 앞으로 나가고, 오토바이가 그 뒤를 따르고, 차가 천천히 비켜서던 장면. 그 장면 뒤로 내 발이 얕게 먼저 딛던 감각. 종이 귓속에서 아주 작게 울렸다. 앞숨이 몸 안으로 퍼졌다. 나는 속으로 또렷하게, 누구의 이름도 아닌, 이름 없는 누군가를 먼저 불렀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순서가 오겠지만, 오늘은 충분했다. 오늘 고친 것은 내 순서였다. 내일의 행운은 오늘의 이유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병 안에서 조용히 빛났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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