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여행 : 대한다원
'그날의 공기는 초록이었다'
자욱한 안개가 머물러 있는 그곳은 사방이 산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개가 구름처럼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했고, 그 유연한 움직임 사이로 초록빛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촉촉한 공기 끝에 머물러 있는 녹차의 향기, 그날의 공기는 녹차의 초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날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그 여행이 좋았던가보다. 오래전 써 놓은 글을 보니 2005년 6월 10일이라 적혀 있다.
혼자 이렇게 멀리 가본건 처음이다.
원래 계획은 친구와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비가 온다고 친구는 싫다고 한다.
이왕 계획한 거 지금 아니면 못 가지 싶어서 혼자서 다녀왔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 새벽의 녹차밭을 만나기 위해 전날 밤 서울에서 순천으로 가는 막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 도착하면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기차역에서 얼마쯤 시간을 보내다 보면 보성으로 가는 첫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날의 목적은 보성 터미널에서 대한다원으로 향하는 첫차였다. 기차 도착시간과 버스 출발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잠 한숨 편히 못 자고 달려왔다.
보성 터미널에서 무사히 첫차를 타고 대한다원 입구에 홀로 내렸다. 부슬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아무도 없는 녹차밭은 안개만이 자욱했다. 이 고요한 초록빛 시간을 만나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초록빛 공기가 폐부 가득 채워지는 상쾌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첫차가 아니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타일러 피곤을 무릅쓰고 먼 길을 달려왔던 터였다. 그렇게 도착한 녹차밭은 초록빛 안개와 함께 신비로움을 선물해 주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풍경과 그날의 공기가 떠오를 정도로 특별한 순간이었다.
산비탈에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는 녹차밭의 물결 속에서 조용히 메아리치는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살며시 내리는 부슬비 덕분에 초록빛 풍경은 한층 짙어져 있었고, 안개와 함께 흩어지는 공기 또한 밀도가 높았다. 발 밑은 질퍽했으나 손 끝에 전해지는 까슬한 녹차 잎은 한껏 싱그러웠기에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에 온전히 혼자 서 있는 시간. 잠시 눈을 감고 아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시간이 너무 좋아서 수 없이 많은 밤을 달려 첫차를 탔다.
겨울의 중심에서 그날이 떠오른 건 단지 계절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대한다원엘 갔었지만 그날만큼 선명하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날 그곳으로 향했던 간절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과거 속에 두고 온 '나'만이 할 수 있었던 수많은 떠남들. 잃어버린 간절함을 깨울 수 있다면 내일 나는 초록빛 공기를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