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는 여행
해 질 무렵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금릉은 공기조차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호주에서 일 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주도로 달려온 길이었다. 타지에서 낯설게 이방인으로 살면서 종종 그 바다가 그리워 가슴앓이를 했다. 해 질 녘의 포구와 금릉의 바다는 오랜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바꿔 놓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풍경에 취해 있을 때, 조용히 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머뭇거리시던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라고 물어보셨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먼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다. 백 명의 좋은 사람보다 한 명의 나쁜 사람 때문에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 참 안타깝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시고는 "사진기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사진 찍으러 온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일몰 보러 가려고 하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같이 가요."라고 하셨다. 재빨리 차 안을 들여다보니 카메라가 있었고, 수척해 보였지만 선한 인상에 어쩐지 믿음이 갔다. 마침 나도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걸어갈 생각이었기에 아저씨와 동행을 하기로 했다.
한림에 살고 있고 사진이 취미라고 하시는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릉 해변 옆 월령에 도착했다. 풍력발전기가 있는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가 마음에 들어 각자 사진을 찍으며 해가 바다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면서 풍경 속에 스며드는 은은함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녹아드는 한 사람. 연세가 있으신데도 열정을 가지고 사진을 담아내는 아저씨의 뒷모습은 서서히 지는 해와 함께 그윽한 풍경 속에서 마치 그림처럼 남겨졌다.
완벽한 날씨는 아니었다. 나에게 아름다운 제주도의 오메가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이미 나는 오늘의 가장 멋진 찰나를 프레임에 담은 후였다. 그 시작은 작은 호의에서 시작되었고, 그 담담하면서 열정적인 뒷모습에서 완성되었다. 바닷속으로 떨어지는 완벽한 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저물어 가는 해를 그곳에 남겨둔 채 돌아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주도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저씨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좀 아파요.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보았던 아저씨의 첫인상이 바로 그거였다. 영락없이 아파 보이는 모습. 모자에 가려진 머리숱이 허전했고, 아저씨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괜히 무덤덤한 게 아니었다. 이것이 동행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아저씨의 말씀을 듣고 말주변이 없는 나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달리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금릉으로 돌아와 바닷가를 걸으며 잠깐의 만남과 그 바다를 다시 떠올렸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일몰이었지만, 잔잔하게 녹아든 풍경, 그리고 평범하지만 특별함이 있는 바다 월령. 그곳은 나에게 선뜻 동행하기를 권했던 아저씨의 모습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없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완성 되었던 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