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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Mar 02. 2021

가장 달콤했던 커피 한 잔

청보리가 살랑이는 어느 따뜻한 봄날. 제주도 안에 있는 섬 속의 섬 우도를 걸었다. 그날의 여행은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우도에 간다는 지인의 말에 충동적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하늘이 맑았고, 바람이 적당했으며, 무엇보다 내 마음이 걷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날의 모든 조건들이 나를 우도로 이끌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초록색 수염을 매달고 푸르게 흔들리던 청보리, 옹기종기 모여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유채꽃, 돌담에 어우러진 우도의 봄은 묘하게 감성을 자극했다. 만약 마음에 드는 상대가 옆에 있었다면 그 분위기에 취해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말랑말랑했던 그날의 기분. 그날의 사랑스러운 분위기.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것 같다.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와 달리 우도에서 하룻밤을 잘 예정인 지인을 따라 숙소가 있는 비양도로 향했다. 섬 속의 섬 속의 섬이라고 해야 할까? 우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비양도는 우도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섬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등대가 하나 있고, 민박집이 하나가 있었다. 주변으로 온통 바다였고, 들판이었던 조용한 섬이었다. 



바다를 곁에 두고 들판에 앉아 한참을 머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니 분주하게 무언가를 담고 계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뭇가사리였다. 바다에서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햇볕에 말려 놓으셨는데 잘 마른 우뭇가사리를 자루에 담고 계셨던 것. 한가득 담은 우뭇가사리 보따리는 할머니의 몸을 덮을 만큼 엄청난 부피를 자랑했다. 


건장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머니를 도와 집까지 우뭇가사리를 옮겨드리는 것.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할머니 댁에 우뭇가사리를 무사히 옮겨드렸더니 커피 한 잔을 하고 가라며 붙잡으셨다. 해녀 일을 하시는지 마당 한쪽에는 물질할 때 쓰는 테왁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 김옥순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친할머니 성함과 똑같았던 할머니의 성함.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 곁에 바짝 앉아 할머니가 타 주시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설탕 하나 둘, 셋, 네 스푼! 끝없이 들어가는 설탕을 보며 당황한 것도 잠시. 전해주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했다. 세상 달콤했다. 투박하신 손으로 타 주셔서 더욱 달콤했고, 그 한 잔에 마음이 전해져서 최고로 달콤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다가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길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 가방에 넣어둔 소세지며 사탕, 초콜릿을 모조리 꺼내드렸다. 적적하지 않으시게, 오늘만큼 달콤하게 저녁을 보내시라고 주머니를 털었다.


내가 마신 건 커피 한 잔이었을 뿐인데, 그 속에는 우리 할머니도 담겨있었고, 거친 바다의 숨결도 담겨 있었다. 적적하셨을 밤의 한숨과 반가운 이들을 향한 손짓도 담겨 있었다. 김옥순 할머니께서 손수 타 주신 커피는 내가 마셔본 가장 달콤했던 커피 한 잔이었다. 


몇 년 뒤 다시 우도를 찾았을 땐, 세월이 참 많은 것을 변화시켜 놓았다. 순수했던 우도는 렌터카 행렬에 짓밟혔고, 렌터카 금지라는 초강수를 두며 폭풍처럼 술렁였다. 할머니가 사시던 집을 기웃거려봤지만 할머니 이름이 적혀있던 테왁도 할머니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저 달콤했던 커피의 기억만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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