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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19. 2020

지미 오름과 무진기행

책 읽는 여행


성산에 있는 고성 오일장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귤 한 봉지를 사들고 나섰다. 인심 좋은 삼춘이 솜씨 좋게 말아주신 국밥이 유난히 맛있어서 바닥이 보일 정도로 싹 비웠더니 여간 배부른 게 아니다. 햇살은 또 얼마나 따뜻한지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왔다. 바닷가를 달리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바다가 유난히 맑았다.

문득, 날씨 좋은 날 꼭 가보고 싶던 곳이 떠올랐다. 하늘과 바다가 흔쾌히 그 아름다움을 허락해준 날. 꼭 혼자 오르고 싶었던 곳 지미 오름. 마침 배도 부르니 소화를 시키자며 호기롭게 지미 오름으로 향했다. 물 한 병과, 귤 두 개, 책 한 권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용눈이 오름, 아끈 다랑쉬 오름처럼 완만한 오름이 아닌 경사가 제법 있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 지미 오름. 나에게는 제법 난이도가 있는 곳이기에 지금까지 날씨를 핑계로 미뤄두었던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지미 오름을 올라야만 하는 그런 날이었다. 날씨가 완벽했으니까.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지미 오름(지미봉)에 오르면 성산과 우도, 아기자기한 종달리 마을과 투명하게 아름다운 바다를 만날 수 있다. 그 멋진 풍경을 만끽하려면 햇살이라는 가장 좋은 조명이 있어야 하기에 날씨 좋은 날을 고집했다. 둘레길과 계단길이 있는데 정면승부를 위해 계단길을 선택했다. 


먼저 오른 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숨 고르기를 하며 한 계단 한 계단 정상을 향해 오른다. 얼마쯤 오르다가 뒤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상만 보고 올라가면 볼 수 없는 멋진 장관은 잠시 서서 뒤를 돌아봤을 때 만날 수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고 있자니 문득 노래가 듣고 싶어 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을 작게 틀었다. 


계단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온몸이 뜨끈해지도록 뭉클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부러운 게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벅차올랐다. 남들보다 느리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이 순간을 정말 사랑한다. 조금 느릴 뿐 한 발짝 한 발짝 올라 결국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계단을 오르고, 뒤돌아 보고,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오름을 1시간에 걸쳐 올랐다. 느린 만큼 여유로웠고, 그만큼 풍족했던 시간. 정상에 도착하니 사방으로 제주도가 펼쳐졌다. 저 멀리 한라산이 보였고, 봉긋한 오름들이 이어졌다. 알록달록한 지붕을 얹은 종달리 마을과 돌담을 쌓은 밭이 펼쳐지고, 놀랍도록 투명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성산일출봉, 우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도 없는 오름 정상에 서서 새콤한 귤을 먹으며 가져온 책을 펼쳤다. 오늘 선택한 책은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작은 사이즈의 책이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 좋아서 여행을 오기 전에 구입했다. 단편소설 4편이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에 무진기행이 있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빛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 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


어린 시절을 보낸 무진에서의 2박 3일, 그곳에는 주인공의 참담했건 과거와 그를 유혹하는 여인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의 몽환적인 분위기,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주인공의 일탈, 그 이야기를 빛내주는 작가의 문체. 과거와 현재가 교묘하게 어우러지는 스토리나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을 읽고 나니 눈앞에 있는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의미로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제주도에 오기 전 머리 아프도록 갈등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하는 갈등과는 다르지만 나를 괴롭히고 있던 갈등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무진을 택했고 나는 제주도를 택했다. 어찌 되었든 제주도를 떠나기 전까지는 답을 얻을 작정이었고, 그날의 지미 오름은 나에게 묵직한 질문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물해 주었다. 

잠시 멈춰서서 바라본 풍경
무진기행과 새콤한 귤 그리고 바다
정상에서 본 바다와 성산일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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