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두렵고 때론 분노한다

엄마와 치매와 함께 5

by 길 위에서

엄마 집에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닷새 전에 해동하기 시작한 명태가 그대로 있었다. 집에 갈 때마다 찌개 끓여 드시라고 말했고 엄마도 그렇게 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날은 냉동되어 있던 가자미도 통째로 냉장실에 내려와 있었다. 엄마한테 물었다. “명태도 아직 그대로 있는데 왜 또 가자미를 녹이는 거야?” 엄마가 대답을 안 했다. 명태 먹기 싫으냐고 다시 물었더니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싱크대에는 전날부터 불린 콩도 그대로 있었다. 나는 또 지적을 했다. “엄마, 왜 이 콩 밥에 안 넣었어?” 엄마는 콩이 덜 불어서 밥 지을 때 안 넣었다고 하셨다. 이틀이나 불렸는데 그럴 리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틀이라니! 아침에 물에 담갔는데 무슨 말이야?” 엄마는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다.


십여 년 전의 대화가 아직 소화가 덜 된 채 몸속 어딘가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방 쪽으로 돌아서던 엄마 얼굴을 스친 표정이 내 마음에 남긴 흔적인가 보다. 엄마는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도 괴로운데 내가 추궁하듯이 물었으니 더 괴로웠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나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다. 그때는 상황도 누구의 마음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이 즈음 일기 노트에 쓴 기록을 여러 해 지난 뒤 발견했다. 내 머리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내 몸은 기억하고 있을,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2012년 9월 25일

가끔 엄마를 잃어버리는 데 대한 분노가 올라온다. 엄마가 이상한 일을 저질렀을 때는 왜 그랬냐고 화를 내고 싶다. 어이없을 때, 내가 앞으로 계속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울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에도 그렇다.

오늘은 점심 약속을 한 백화점 9층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혼자 속을 태웠다. 장소를 착각했을까? 약속을 기억하기는 하나? 오다가 길을 잃었나? 십여 분 뒤 약속 시간에 거의 맞춰 엄마가 나타났다. 나는 안도했다.

지난번 점심 외식 때는 엄마가 먼저 와서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내게 버럭 화를 냈다. “왜 이제 와?” 그래서 오늘 내가 너무 일찍 나간 거였다. 사실은 엄마가 또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나는 두렵고 때론 분노한다.





20240723_일기 노트.jpg


옛 기록 속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도 용기가 좀 필요하다. 두려움이 앞서는 탓에 선뜻 노트를 펼치지 못한다. 7년에 걸친 토막 시간이 담긴 노트가 7권 있다. 2012년 4월에 쓰기 시작했고, 마지막 글은 2019년 2월 7일 기록이다. 일기를 쓰기로 작정하지는 않았다. 어떤 노트는 꿈을 기록하려고 쓰기 시작했고, 어떤 노트는 책을 읽다가 메모를 남기려고 쓰기 시작했다. 연필로 대충 써서 알아보기 힘든 글자도 있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한 날도 물론 있었다. 이 노트 저 노트에 마구잡이로 썼고 아예 안 쓴 때도 많았다. 그렇게 채워진 뒤죽박죽 노트가 7권 쌓였다. 그래도 소중한 기록이다. 물건 버리기 달인인 엄마의 딸이 이걸 없애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