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공부 중
수십 년 동안 감정을 무시하며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내 감정을 무시하는 줄도 몰랐다. 바쁜 나날을 살아가는 데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믿었나 보다. 그야말로 무지했다.
7년 전,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이끄는 프로젝트의 활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선생님과 내 삶의 이슈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십 대 때 잃은 오빠와 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하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흘렀으나 기억은 뚝뚝 끊어졌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시간도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눈물에 감정이 묻어 있지 않네요.”
전문가의 해결책을 기대했던 나는 좌절했다. 실제로 내 몸과 감정은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씀은 사실이었고, 한동안 내게 상처였다. 동시에, 아마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말씀이 내 공부의 길잡이가 되었다.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기까지는 5년쯤 걸렸다. 시작은 ‘애도 모임’이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경우 여러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음은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슬픔을 그냥 묻어 두면 나중에는 그 감정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른다. 억눌렀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몸으로 파고든다. 이런 증상은 나도 몸으로 겪고 있었다. 나는 미처 하지 못한 애도 작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계획이기보다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재작년이었다. 8년 전에 가입한 상조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의 자발적 모임에 장소와 운영비를 지원해 준다는 공지가 나왔다. 나는 애도 모임을 기획해 신청서를 냈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애도 모임을 준비하는 일은 삶에서 밀쳐두었던 슬프고 화나고 아픈 감정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었다. 참가자들의 사연에 서로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꺼낼 수 있어서 후련했고, 다른 참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작년에는 애도와 관련된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모임을 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한 철학자가 마지막 일 년 동안 쓴 일기를 묶은 책을 읽었고, 감정 자체를 다루는 심리학 책도 읽었고, 주인공이 상실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소설도 읽었다. 기획 의도와 달리 실제 모임에서 자신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여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말하는 편이 덜 위험하다고 느꼈을까? 아니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느낌과 감정을 스스로 잘 이해하고 또 차분히 표현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작년에 엄마가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엄마는 음식을 전혀 드시지 않았다. 나는 면회를 다녀오고 대기 상태로 닷새를 보냈다. 극도로 불안하고 답답했다. 거대한 덩어리에 온몸이 눌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덩어리와 함께 닷새를 살았다. 미리 꼭 연락해야 할 몇몇 친척들에게만 연락했고, 함께 면회를 가거나 간단히 통화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막연히 짐작했다. 그렇게 묵묵히 지낸 시간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몇 달 뒤 게슈탈트 심리치료 창시자로 알려진 펄스의 책에서 다음 글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체험을 피하려고 말로만 떠들어 대며 저항한다. 단지 말로만 표현하면 그때 기억은 폼페이의 폐허처럼 죽은 장소가 될 뿐이다.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해결 과제를 지혜롭게 재구성할 기회를 날려 보낸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말없이 침잠해 지내길 잘했다고 저자가 지지해 주는 것 같았다. 감정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길이 보였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감정과 함께하며 깊이 느끼는 방법 말이다.
나는 감정을 공부하는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