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치매와 함께 14
엄마의 강박 행동 중 하나는 화장실 가는 것이었다. 소변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자꾸 화장실에 갔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날 때 발뒤꿈치로 매트를 미는 동작을 반복했다. 얼마나 많이 자주 그랬는지 양말도 신고 있었는데도 발뒤꿈치 피부가 벗겨졌다. 결국 발뒤꿈치에 두툼하게 붕대를 붙이게 되었다.
2014년 4월 17일
오늘 병실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요즘 자주 오네.” 하시면 희미하게 웃었다. 약 기운 때문에 등이 구부정한 정도가 아니라 머리가 거의 가슴에 닿을 만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내가 가져간 고구마와 오렌지를 드셨다. 사그라진 모습에 마음이 더 짠했다.
그래도 엄마가 나를 반가운 사람으로 기억하셨으면 하는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엄마가 조금이라도 편안하셨으면 하는 바람만 남는다.
(일기 중에서)
불안과 강박 증상 때문에 처방된 약도 많았다. 저녁 약은 한 줌에 가까웠다. 약 기운에 취해서 정신이 없을 때도 화장실에 계속 갔고 잠도 잘 자지 않았으니 낙상 위험까지 높았다. 주치의는 엄마의 의지가 너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잘 주무시도록 약을 추가해도 약 효과는 이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엄마가 의지로 약 기운을 넘어서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치의는 비급여 치료 프로그램을 권했다. 자기장 자극을 머리에 가하는 치료였다. 잠을 자고 안정을 찾는 게 급선무였으므로 동의했다. 다행히 그 치료가 효과를 발휘했고 엄마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상처가 생겼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고 일어설 때마다 안전 가드 끝에 부딪혀 허리 뒤쪽에 상처가 났다. 그 상처를 치료해도 엄마가 드레싱을 벗기고 만지는 바람에 상처는 심한 욕창처럼 악화되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 분이 어떻게 욕창이 생겼어요?”라고 물었다. 엄마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걸어 다니는 욕창 환자’였다.
요양병원에서 욕창이 더 나빠진 엄마는 결국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아기 주먹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 같은 심한 욕창이었다. 상처 치료하는 걸 옆에서 봤더니 소독 거즈가 몇 개나 상처 부위로 들어갔다. 주치의는 보신탕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젊은 여의사가 며칠 후에 보신탕을 또 언급했다. 두 번씩이나 권하다니 이유가 있겠다 싶었다. 그날 당장 보신탕 2인분을 사다 드렸다. 간병인은 그 탕을 사흘 동안 끼니때마다 조금씩 챙겨 드렸다. 며칠 후에 병원에 갔더니 간병인이 엄마 얼굴이 뽀얘졌다고 하셨다. 보신탕 효과였을까? 치매 걸리기 전의 엄마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음식을 엄마는 별 거부 반응 없이 드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보신탕을 엄마에게 사 드리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도 아시면 잘했다고 하실 것 같았다.
입원해서 욕창 집중 치료를 받던 중에 요양원에 빈자리가 났다. 주치의는 요양병원과 요양원 어느 쪽이 더 맞을지 알 수 없지만 요양원을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했고, 엄마는 퇴원 후 요양원으로 갔다. 요양원에는 3인실과 4인실이 있었다. 4인실에서는 요양보호사 한 분이 어르신 네 분을 돌보았고, 3인실에서는 요양보호사 한 분이 두 방의 여섯 분을 담당했다. 둘 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루고 교대근무를 했다. 3인실에는 걸을 수 있는 분들이 많았는데 엄마도 3인실로 배정을 받았다.
드디어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긴 날, 엄마는 그 방이 싫다고, 전에 있던 곳에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확 달라진 분위기 때문에 그 방이 낯설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까지 났고 그저. 막막했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첫 밤을 보낸 날, 나도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엄마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요양원에 다시 갔다. 옆방 요양보호사를 만났는데 엄마가 잠을 안 자고 밤새 기저귀를 뜯었다는 말을 들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다른 방에 가자고 했다. 다른 자리가 없다고 대답하면 엄마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다음 날도 그랬다.
입소 3일 후,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병실을 조정하는데 엄마를 4인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4인실은 좀 더 중한 어르신들이 있는 방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로서는 그나마 걱정을 좀 덜 수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간호사는 엄마의 욕창이 심각해서 소변이 닿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니까 소변줄을 꽂고 휠체어에 앉아 계시는 게 좋겠다고, 소변줄에 동의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엄마를 억지로 앉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호사가 나를 설득했다. 엄마의 욕창은 근육층까지 파괴된 아주 심한 상태여서 소변이 상처에 닿게 되면 생길 위험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비틀비틀 걸어 다니시면서 쓰러질 위험도 매우 컸다. 결국 나는 좀 더 안전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소변줄에 동의하고 방을 옮겼다. 그 방에 간 날 엄마는 잠을 잘 잤다. 방 분위기가 입원실과 좀 더 비슷한 점도 영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새로 옮긴 4인실 담당 요양보호사인 김 선생님은 차분한 인상이었다. 그분을 만나고 나니 내가 일단 좀 안심이 되었다. 교대 근무하는 짝인 다른 분은 더 부드러운 인상에 말수가 적었다. 상황이 좀 나아지긴 했으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있을 때도 엄마는 “이 주렁주렁 달린 게 다 뭐고?”라고 묻고 또 물으며 자꾸 떼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니 요양원 입소 후 꽂게 된 소변줄은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게 도대체 뭔가 싶었을 것이다.
오전에 들른 날, 김 선생님이 나를 보자마자 벌써 기저귀를 두 번 갈았다고 했다. 엄마가 소변줄을 자꾸 만져서 소변이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마음이 편치 않고 주눅이 들었다. 그냥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한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 소변줄 만지지 마.” 또 다른 날, 병실 입구 화장실 문에 비스듬히 엄마의 휠체어가 끼어 있는 걸 봤다. 엄마는 화장실 강박이 여전해서 소변줄을 꽂고도 자꾸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고, 휠체어 운전 솜씨까지 좋아서 혼자서 비좁은 화장실에 휠체어를 밀어 넣으려고 하던 중이었다.
드디어 김 선생님이 말했다. “이 어머니 모시는 일 정말 자신이 없어요.”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양병원의 간병인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어머니가 얌전한 인상인데 의외로 사고 치는 일이 많네요.” 엄마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고집은 엄청 셌다. 엄마와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이런 막막함에 눈물이 쏟아졌고, 그래서 더 난감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 눈물이 김 선생님 마음을 더 무겁게 했을 것 같다.
이런 상황도 모두 지나가는 과정이었다. 나중에는 꼼꼼한 김 선생님의 완벽주의 성향을 알고 이렇게 생각했다. 김 선생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힘드셨나 보다. 시간이 지나자 내 마음에 김 선생님은 미덥고 고마운 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