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부리바와 어느 아버지

by 길벗 스토리텔러

대장 부리바와 어느 아버지


2022년 들어 거의 반 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뉴스 메이커는 우크라이나이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전쟁에 휩싸인 우크라이나는 며칠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장기간 선전함으로써 ‘푸틴’의 야욕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전쟁이 가진 어두운 속성 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어린이들의 희생이다. 마음 아픈 뉴스를 몇 달이나 지켜보던 중, 6월 들어 아픈 뉴스 하나가 더 보태지니 바로 완도에서 일어난 어린이 가족 실종사건이 그것이다.


또 하나의 잊혀진 전쟁으로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포함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위아래를 이단(二段)으로 가르는 국기의 색이 파란 하늘 아래 비옥한 국토를 상징한다거나, 해바라기를 많이 재배하여 세계인이 소비하는 해바라기씨 기름의 1/3이 여기서 난다는 이야기 말고도 주워들은 것이 제법 많다.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이탈리아 영화 ‘해바라기’에서 여주인공 ‘조반나’가 사랑하는 남자 ‘안토니오’의 전사통지서를 받아들고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 나선 2차 세계대전의 전장(戰場), 기차의 차창(車窓) 밖으로 끝없이 이어진 해바라기 벌판이 이 나라 영토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름 없는 병사의 무덤을 찾아 헤치고 다니던 해바라기밭, 영화 제목이 거기서 왔다는 것까지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모르던 사실들이다. 소련이라는 큰 덩어리로만 이해했기에 막연히 러시아 출신으로만 여겼던 문호 도스토옙스키와 고골,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사실도 새로운 발견이다. 거기 더해 한 가지 덤이 더 얹혔으니, 중학생 시절 영화관에서 재미있게 감상한 영화 한 편의 되새김이 그 것이다. ‘타라스 불바’. 우리나라에서 ‘대장 부리바’로 제목 붙여 개봉된 영화이다.


알고 보니 코자크는 우리가 소련(蘇聯)이라 불렀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의 15개 독립공화국 중 하나였던 우크라이나 땅에서 기원한 민족이라고 한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을 두고 주목을 받았던 ’자포리자‘라는 지역. 바로 그곳이 코자크족의 중심 터전이었다는 것을 이 전쟁이 아닌들 어찌 알았으랴. 영어식으로는 ’코자크‘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카자크‘로 발음하는 이 종족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일대에 분포한 슬라브계 집단으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자신들의 국가를 형성한 민족적 원형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영화사(映畫史)를 통틀어 불멸의 성격파 배우로 꼽히는 ’율부린너‘와 미남 배우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재미있고 스펙타클한 이 영화는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의 소설이 원작이다. ’고골‘은 문학소년 시절 읽었던 ’외투’라는 소설의 작가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같은 러시아 문호(文豪)들에게 영향을 준 슬라브-러시아 문단의 선배이자,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당시 강국 폴란드에 대한 ’코자크‘의 항쟁 이야기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기에 얼마나 각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영화는 코자크가 폴란드에 죽기 살기로 엉겨 붙었던 이유를 알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니 감상 당시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역사적 배경은 몰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멋있는 두 남자 배우와 정말 아름다웠던 이름 모를 여주인공, 흥미진진한 줄거리 전개와 광활한 초원에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기마(騎馬) 부대 진군(進軍)과 전투 스펙타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성인이 된 후 TV ’명화극장‘을 통해 한 번 더 봐서 그런지 줄거리는 물론 대미(大尾)에 나온 주인공의 대사까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난다.


2009년 리메이크되기도 한 이 고전 영화의 제작 시기는 1962년이다. 배경은 폴란드가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코자크 기병을 동맹(同盟)으로 끌어들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 코자크를 배신하고 그들의 터전인 초원을 복속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는 시점이라고 한다. 배신한 폴란드를 두고 여러 부족 중 한 부족의 족장이자 부대 대장인 ’타라스 불바(Taras Bulba/대장 부리바/율부린너 粉)‘는 애지중지하던 변발을 자름으로써 반드시 복수하리라 비장하게 선언한다. 한편 코자크 최고의 용사로 키우기 위해 견문을 넓히라는 뜻에서 폴란드의 어느 성(城)으로 유학을 보낸 부리바의 두 아들은 폴란드인으로부터 차별과 배척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가 했는데, 큰 아들 ’안드레이(토니 커티스 粉)‘가 귀족의 딸 나탈리아와 사랑에 빠져 위험한 애정 행각(行脚)을 펼치다 그만 폴란드 장교를 죽이고 성에서 도망쳐 나온다.


몇 년이 지난 후, 폴란드와의 동맹에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는 총사령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리바는 자신의 부대만으로라도 복수를 하겠다며 기병대를 이끌고 폴란드로 진군한다. 무모해 보이는 출발이었다. 초원을 달리는 부리바 부대와 저 먼 곳에서 나타나 그 뒤를 좇는 다른 부대가 번갈아 비춰지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긴장하던 관객들은 폴란드 공격에 합류하는 다른 코자크 부대들로 밝혀지자 안도한다. 이어지는 또 다른 합류, 극적으로 형성된 대부대가 초원을 달리는 스펙타클은 관객들을 압도한다. 폴란드와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코사크 부대가 굶겨죽일 작정인 양 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에 돌입하자, 성(城) 안은 굶주림과 전염병까지 겹쳐 무너지기 직전이다. 그때 부리바의 아들 안드레이는 사랑하는 여인이 보고 싶어 성내에 잠입하여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적들에게 붙잡힌다. 조국을 배신했다며 여인에게 화형 언도가 내리고, 쌓아놓은 장작 가운데 나탈리가 묶이자 안드레이는 그녀를 살려주는 대신 코사크의 소들을 훔쳐 성내로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단 풀려난다. 성문이 열리고 폴란드군이 나오면서 다시 전투가 개시된 상황, 소떼를 몰고 성으로 향하던 안드레이는 아버지와 맞닥뜨린다.


사랑 때문에 조국을 배신한 아들에게 부리바는 권총을 뽑아들고 말한다. 다른 대사는 기억나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구절만 선명하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 너의 생명을 거둔다.” ’빵‘하는 소리와 함께 은색 갑옷에 총알구멍이 ’뻥‘ 뚫리며 쓰러지는 안드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대사였다. 고골의 원작 소설 속 문장도, 시나리오의 대사도 아닌 우리나라 번역가의 솜씨일 확률이 높지만 참 명대사로 기억하고 있다. 아들보다는 조국을 더 사랑한 대장부의 최고 명대사로 깊이 새긴 이유가 ’마초이즘(machoism)‘ 혹은 애국심에 젖어 있던 중학생 시절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안드레이는 죽었고, 영화는 조금 더 이어진다. 부리바 부대를 향해 이때다 하고 성밖으로 공격을 개시하는 폴란드군의 기세에 밀려 부리바 부대가 패퇴하는 중, 초원의 여러 방향 언덕 넘어 쏟아져 나오는 코자크 기병대들. 코자크 부대의 계략이었던 것을 모르고 밀어붙이던 폴란드군은 결국 절벽으로 밀려 전멸한다. 적들을 무찌른 후 폴란드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안드레이의 시체를 안고 흐느끼는 나탈리아를 부리바가 말 위에서 말없이 내려다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전쟁 소식 말고 한 달 안팎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또 하나의 뉴스, ’어린이 가족 실종‘ 미스터리의 결말이 드러나는 듯하다. 부모와 함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한다며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떠난 초등학교 5학년생과 그 가족이 정작 제주도가 아닌 완도에서 흔적도 없이 실종된 사건이다. 부모의 경제적 파탄에 따른 위험한 선택의 가능성 때문에 연일 수색 상황과 그 귀추가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뉴스이기도 하다. 실종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가족 세 명이 탄 승용차가 바닷 속에서 발견, 인양되었고, 사인을 밝히기 위한 부검 결과가 마침내 발표되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어린이와 어머니에게서 수면제가 검출되었다는 사실과 복원한 블랙박스를 통해 부부의 대화를 확인한 결과 치밀하게 계획한 극단적 선택으로 잠정 결론이 나왔다. 한 달 너머 예단(豫斷)은 있으되 함구(緘口)가 미덕인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지던 차였다. 숙소에서부터 축 늘어져 엄마에게 업혀 나오는 CCTV 화면으로 미루어 아이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아이 엄마는 승용차 안에서 수면제를 주입한 후 아이 아빠가 차를 몰아 바닷물로 돌진했다는 추론 외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모양이다.


사업 실패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부부가 자기들만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혼자 남을 딸이 어찌 살아갈지 걱정이 왜 안 되겠는가. 혼자 남은 아이가 이후 감당 못할 슬픔에다 각박한 세상 살면서 겪을 숱한 어려움에 대해 부모의 고민이 왜 미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이 사건은 명백한 자녀 살해(비속/卑屬 살해)라는 비난이 거세게 쏟아진다. 최근 다른 유사한 다른 사건들이 있었기에 “부모야 자신들의 선택이지만, 자녀는 선택조차 못 하게 하는 범죄”라는 여론이 누적되어 쌓인 탓이다. 생명의 주체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기도 했고. 사실 이전에는 “오죽하면”, “혼자 어찌 감당할꼬”라는 감성적 공감에 묻혀 예각(銳角)을 감춘 어두운 화두이기도 했다.


가공의 이야기와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 말고도 처한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할 수도 없는 두 사람, ’대장 부리바‘와 ’완도 어린이의 아버지‘. 그들에게 던져진 고심과 선택 모두 한 가지로 무거웠겠지만 책임 있는 아버지라고 해서 자식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거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게 중심을 두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리 남의 이야기지만, 인터넷 뉴스 기사의 댓글처럼 쉽게 욕설까지 덧붙여 나쁜 놈, 살인자라는 단호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 솔직한 나의 속내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린이의 희생을 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수십 년간 간직했던 영화 대사에 대한 환상을 이제 접으려 한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 내가 너의 생명을 거둔다.”


부모라고 해서, 자신의 뜻대로 자식의 생명을 거둘 수는 없다. 절대로.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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