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선물이 약이라니

by 길벗 스토리텔러

결혼 35주년이란다. 벌써 30주년이구나 했던 때로부터 또 5년이 흐른 것이다. 이맘때면 허리까지 눈 쌓인 설악동과 썰렁했던 낙산해수욕장 횟집촌 풍경이 떠오른다. 35년 전 1월말, 폭설로 며칠 폐쇄되었던 속초공항 첫 운항 비행기 편으로 떠난 신혼여행, 설악산과 낙산 주변은 인적이 끊어졌다 해도 과장 아닐 정도로 고요하고 아늑했다. 좋았다.

이왕이면 결혼기념일 선물로 필요한 걸 해주고 싶다 했더니 결혼기념일은 서로가 챙겨주어야 할 날인데 왜 당신이 일방 해줄 생각을 하느냐는 모범답안이 돌아왔다. 모범답안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결혼 초기부터 집안일 돕기, 처가 행사에 적극 나서기, 아이 돌보기 같이 배점 높은 과제에 등한하면서도 핍박받지 않고 살아 뭇 사내들의 부러움을 샀다. 남자에겐 바깥 세상도 중요해. 아내의 너그러움에 의지하여 거침없이 밖으로 떠돌며 모범답안을 남들에게 자랑했고, 남들은 나의 처복을 부러워했다. 그땐 그랬다. 모범답안을 액면대로 믿었을 때는.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기가 되면 한번 어긋날 때마다 누적된 불만이 합산되어 봇물로 쏟아진다는 걸 모를 때의 복에 불과했다.

봇물은 거셀 뿐 아니라 쏟아지는 시간도 길어 괴롭다. 굵고 짧은 매가 아니라 굵으면서도 긴 매인 것이다. 그 많은 죄목 열거가 때마다 반복된다. 이번 잘못한 것만 가지고 야단치면 “시정하겠습니다”하고 대충 눙치며 넘기겠는데, 한번 시작하면 30년 세월의 죄상을 요점 정리하여 녹음테이프 틀 듯 반복하니 견디기도, 벗어나기도 어렵다. 세월이 갈수록 죄목이 늘어날텐데, 여든쯤 되면 어찌 견딜지 모르겠다. 죄목을 늘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범답안대로 가지 않아야 한다.

젊을 적, 제법 대접받는 남편으로 살게 된 데에는 이벤트에 강한 나의 면모가 한몫했다. 별거 아닌 내용물을 감동으로 포장하는 기술에 능했던 것이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는 작은 아이템으로도 기술을 부렸다. 시집 한 권과 셀로판으로 싼 꽃 몇 송이 정도의 알량한 물품이지만, 시집 속표지 안에 몇 줄 쓰는 것이 핵심기술이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그녀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내게 있었던 것이다. 문학에 취했던 시절이라, 신문에서 출간 소식과 서평을 유심히 살피기도 했고, 한 주일에 서너 번은 단골 서점에 들러 신간을 뒤적이는 게 즐거운 일상이기도 했다. 친구나 동료들의 생일 선물도 주로 책 한 권이었다. 한 해 수십 권의 도서를 구입하니 안국역 근처 ‘문장사’라는 서점에서 최고 수준의 할인을 받는 고객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눈여겨 본 시집을 사서 속표지 안쪽에 그 시집 중 가장 절창이라 할 만한 싯구절을 적고 그 아래 나의 메시지를 간단히 적는 식이다. 시보다도 나의 메시지에 감동하는 눈치인데, 연애 시절 레스토랑에서 술 한 잔 하다가, 한 장 뽑아 거기 즉흥 고백을 써준 냅킨을 아직 앨범에 꽂아둔 아내의 정서를 공략하는 술수에 다름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내성이 생기고 약효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이가 커가고 물가가 오르니,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이벤트보다 현금의 효력이 우세해진 현상을 아내의 탓으로 돌릴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현금의 약발은 지금도 세지만, 이제 연금생활자가 된 나는 감당하지 못하고 아내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비싸지 않은 옷이나 미용·운동기구, 심지어 아내의 편의를 위한 살림살이 비용을 분담해주는 것으로도 만족해한다. 액수에 따라 전담일 때도 있지만, 주로 분담이니 내 사정을 헤아려주는 합리적인 선물이고 서로 만족할 수 있어 좋다.


35년 중 34년 동안 튼튼하던 아내가 작년부터 이곳저곳 고장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지만 안면마비 증상으로 긴급히 뇌 mri를 찍기도 했고, 척추와 어깨 질환으로 잠도 제대로 못자서 고가를 지불하는 치료를 받느라 실비보험 한계를 초과하기까지 하였다. 요즘은 매일이 아니라 띄엄띄엄 정형외과에 다니는데, 조금 상태가 나아진 점도 있지만, 비용 관리의 측면이 크다는 바를 모르지 않는다. 어쨌든 지병인 신우신염 말고 안면 마비 증상, 관절염, 소화 장애까지 한꺼번에 나타난 시점이 함께 산 35년 중 1년 안짝 일이다.

아내가 모범답안을 내놓으며 선물을 사양하지만 나는 내심 생각하고 있는 아이템이 따로 있다. 척추 질환과 관절 건강에 좋다는 기능성 식품인데 꽤 고가의 수입품이다. 과한 비용 탓에 증세가 조금 완화되면 복용량을 줄이는 등 아껴 먹는 눈치여서, 권장량은 채울 정도로 여유 있게 구입해주려고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약이라니... 안쓰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건강식품은 약이 아니라지만 무에 다르랴. 안 좋은 몸 고치자고 먹는 거니 그게 그거지.

후두암수술에 부정맥 치료 시술에, 담낭 절제, 급성 위출혈 등으로 응급실과 병실 수발 숱하게 시킨 사람은 나였다. 그랬던 내가 그녀의 살뜰한 '챙김과 돌봄' 덕에 요즘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데, 정작 그녀가 병치레하니 더 짠한 것이다. ‘약’의 구입처와 구매 방법을 모르므로 결국 현금 내밀어야 할 텐데, 그 쑥스런 순간에 이렇게 너스레를 치며 넘어갈까 보다. “결혼기념일은 서로가 선물 챙겨주는 날이라는 당신 말이 모범답안이요. 하지만 이만큼 내가 건강한 것이 당신 덕이니 난 선물 벌써 받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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