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낙산 넘어 동대문으로-1
- 주변에 대학교가 많아 '대학로'인가?
- 대학로 -
대학로(大學路)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에서 혜화동을 직선으로 잇는 도로의 이름이다. 한편 단순히 도로 이름에 그치지 않고 ‘마로니에 광장’을 비롯한 주변 일대의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한 지역 일대를 아우르는 이름으로도 쓰인다. 지금은 수많은 연극 공연장과 문화단체,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활동하는 문화예술의 거리이지만, 이곳이 1975년 전후까지 국립 서울대학교의 주요 캠퍼스였기에 이를 기억하고자 대학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곳에 있던 서울대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 총독부가 서울(당시 경성부)에 설립한 관립 종합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광복 이후인 1946년 체제를 정비하고 명칭을 바꾼 것이다. 1975년 즈음 현재 캠퍼스인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가기 전까지는 마로니에 광장 쪽-동숭동에 법학대학, 문리과대학 문학부와 건너 편인 연건동에 의과대학, 미술대학이 있었으며 현재도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사정을 알고 나면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간 것을 단순히 확장 이전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 전에는 단과대학들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으니, 공과대학은 공릉동, 문리과대학 이학부는 청량리, 상과대학은 종암동, 사범대학과 가정대학은 용두동, 음악대학은 을지로 6가,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은 수원, 치과대학은 소공동으로 서울과 경기 일대에 뿔뿔이 흩어져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지에 흩어진 단과대학들이 느슨한 연합체로서만 존재하였으므로 일체감 조성은 물론 통합적 학술교류나 공동 연구조차 어려운 환경이어서 관악캠퍼스 조성은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종합화’라는 필연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현재 도로로서의 대학로는 원래 개천이었으니, 다리를 건너야만 동숭동 캠퍼스와 연건동 캠퍼스를 이동할 수 있었다. 복개(覆蓋)되어 사라진 이 개천은 성균관(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좌우에서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합쳐진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흥덕동천(興德洞川)이라 하였으며,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지천이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가요의 가사로도 유명한 ‘마로니에광장’이란 이름은 이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커다란 칠엽수에서 비롯한다. 사실 ‘마로니에’란 유럽에 많이 분포하는 가시칠엽수를 말하는데, 경성제국대학 시절 일본인 교수가 심었다는 일본 칠엽수를 유럽산으로 오해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칠엽수란 잎이 일곱장이 난다고 하여 부르는 나무 이름으로 전 세계에 25종 정도 분포하는데 열매 속에 밤톨 비슷한 씨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 또는 일본의 칠엽수와 달리 열매 표면에 긴 돌기물이 돋아 있어 가시칠엽수라 부르는 서양칠엽수(Horse-chestnut)는 스페인, 프랑스 등 남부 유럽국가에 많이 분포한다고 한다.
대학로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주를 이루는 경관상의 특징을 가진 곳이다. 이만큼 일관된 테마로 조성된 거리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다. 모두 건축가 김수근으로부터 유래한다. 서울대학교가 떠난 후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당국의 발상이 발표되었을 때, 샘터사 대표인 김재순과 건축가 김수근을 비롯한 문화인들은 반대 여론을 형성해, 마침내 이를 무효화시키고 정부 주도로 문화의 거리를 조성한다는 대안을 관철시킨다. 그리고 김수근이 디자인한 김재순의 ‘샘터’ 사옥과 ‘아르코 미술관’이 1979년에, 아르코 예술극장이 1981년 완공된다. 그 후에는 특별히 어떤 지침을 준 것이 아닌데도 새로 들어서는 공간마다 붉은 벽돌 건물들로 채워져서 오늘날과 같이 특색 있는 거리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원서동에 있는 김수근의 대표작 ‘공간사랑’과 장충동의 ‘경동교회’, 서울대학교병원 경내에 있는 '간(肝)연구소'도 붉은 벽돌로 지어진 것들이다.
혜화동 로터리 방면으로 걸어가면 담쟁이로 덮인 ‘샘터사’ 사옥을 지나게 된다. 이어서 이어서 흥사단 건물과 그 양편에 있는 두 분의 흉상. 말 안해도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안창호 선생과 타고르의 흉상이다. 도산 안창호(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지만,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한 분으로도 그 그늘을 오늘날까지 드리우고 있는 분이시다. '샘터사'는 현재 이곳에 입주해 있지 않다. 경영난으로 건물을 매각한 채 입주만 한 상태였으나 현재는 인근에 다른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안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인도의 벵골 출신으로 191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신 분이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를 ‘동아일보’ 지국장이던 기자가 찾아가 조선 방문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일정상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동방의 불빛(The Lamp of the East)'이라는 넉 줄의 시를 써 주었다고 전한다. 즉석에서 메모 형식으로 받은 메모를 시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에다, 불과 네 줄짜리 시에다 그의 시집 ‘기탄잘리’의 35번째 시를 덧붙여 길게 만든 정체불명의 시가 여기저기 실리기도 하는 등 말 많은 작품이다. 한국을 '동방의 불빛'으로 칭송한 세계적 시인이라 하여 교과서에도 나온 인물이니 우리나라에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 흉상이 세워진 이유도, 그가 '한국-인도' 간 유대의 상징이 된 것도 모두 '넉 줄'짜리 시(인지 메모인지)덕분이다. 기탄잘리(gitanjali)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으로 모두 157편의 종교적, 영성적 적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으로,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이다.
동성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삼선교 방면으로 모서리 돌면 거기 ‘천주교 혜화동 성당’이 있다. 1927년 ‘종현(명동)본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설립한 ‘백동(혜화동)성당’은 우리나라 세 번째 본당이다. 첫 번째는 1893년 창설된 ‘약현(중림동)성당’이고 두 번째는 1898년 창설된 ‘종현본당’-현재의 '명동성당'이고. 현재의 본당 건물은 1960년 건축가 이희태(李喜泰)가 설계한 것이다. 여느 고딕식 성당들과 다르게 벽돌 아닌 직사각형 화강암 석재로 외벽을 꾸민 것이 특징이며 전면 현관 위 화강석에 새긴 ‘최후의 심판도’가 유명하다. 이는 1961년 김세중(金世中) 서울대학교 교수가 조각한 것이다. 이희태 선생은 남산 국립극장, 국립경주박물관, 성라자로마을 등을 설계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건축가이시고, 김세중 선생은 서울대학교 미대학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교육-문화계의 요직을 거친 분으로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을 만든 조각가이시다. 2323년 96세를 일기로 별세하신 김남조 시인의 부군이신데 아까운 연세로 1986년에 타계하셨다.
- 혜화동과 동소문동, 하나의 문에서 나온 두 개의 동네 이름
- 혜화문 -
한양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혜화문(惠化門)은 북동 방향으로 설치된 소문으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동대문(흥인지문)과 북대문(숙정문)의 사이에 위치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출입구였다. 북대문 격인 숙정문은 험한 산중에 있는데다 늘 폐쇄했다고 하니 북쪽으로 가는 사람도 이 문을 거쳤다 한다. 처음 붙인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뒤에 창건한 창경궁의 정문으로 같은 이름이 지어지자 부득이 위계가 낮은 이 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4대문과 4소문의 설치와 역할에 대해서는 연구 결과, 최근 이론(異論)이 제기된 사실을 알고 있으나 여기서는 통설을 따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에 돈암동까지 전차길이 이어지게 되자, 고개를 깎아 도로와 전차길을 내면서 헐렸으나, 1992년 원래의 위치에서 1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원래와 비슷한 높이의 장소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 한양도성 성곽 중 가장 걷기 좋고 공부하기 좋은 길
- 한양도성 낙산구간(가톨릭대학교 뒷길~낙산) -
대부분의 한양도성 구간은 성벽의 바로 아래를 따라 걸으니 성벽과 여장을 살펴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나 낙산 구간은 산책로가 성벽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 좋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성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데다, 성 안쪽에 높게 자란 나무의 잎들이 계절 따라 다양한 색으로 바뀌는 풍경을 보기에도 좋다. 전철역과 버스 정류장이 다 가까워 낙산공원 접근성이 그만이다. 성벽을 비추는 조명과 함께 올라갈수록 서울 북동쪽 야경 전망이 좋은 곳이다. 무너져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간들이 교대로 나타나 시대별 축성 기술을 비교해 보기에 좋다. 안내판을 참고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성벽 너머 나뭇잎이 무성한 자리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가톨릭대학교 ‘신학부’-의 교정이다. 그러고 보니 저곳은 가톨릭대학교, 동성중고등학교, 혜화동성당, 혜화유치원, 가톨릭청소년회관 등 한국 가톨릭의 신학적, 교육적 요람이다.
- 마을 이름이 369라, 무슨 뜻?
- 삼선동 369 성곽마을 이야기 -
한양도성 낙산구간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왼쪽에 개발되지 않고 옛모습을 간직한 동네가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파트가 즐비한데. 이 마을은 6.25 전쟁 이후 집을 잃은 사람들과 당시 북한 땅에서 남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허가 없이 짓고 살던 판잣집촌이 그 시초라 하며, 한때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많이 살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지금이야 90세는 돼야 장수 소리 듣지만 30년 전만 해도 예순 넘으면 노인 대접 받던 시절 이야기다. 동네를 헐고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있을 때 의견 대립과 갈등을 주민 투표를 통해 극복한 사례로 꼽히는 마을이라고 한다. 투표 결과 성곽의 보존 가치와 마을의 전통적인 형태를 조화롭게 유지하자는 마을 재생 방식이 채택되어, 오늘과 같은 경관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마을임을 자랑스럽게 그려내기 위해 재개발 추진 당시 불리우던 ‘삼선6구역’을 줄여 ‘369마을’로 부른다는 스토리가 마을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거기 따르면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주도하고 화합하는 세가지 가치를 지닌 언덕 마을(삼육구/三育丘)’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고 한다.
-낙산은 한양도성의 내사산 중 가장 낮은 산
- 낙산 공원 -
장수마을을 지나 낙산 구간 한양도성의 언덕을 오르다 보면 정상 부근에 성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통로가 있다. '암문'이라고 하는데 역사성은 없고 주민의 통행을 위해 성벽을 복원할 때 만들어 놓은 통로라고 보면 된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공원이 나타나면서 서울 시내의 넓은 전경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조망과 야경 명소로 잘 알려진 점 말고도, 한양도성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라, 한양도성의 축조 범위에 대해 설명하기에 좋은 곳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백악산 정상이 한양도성을 최초로 축조하던 당시 97개 구간의 시작점이자 종점인 곳으로 바로 아래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 정상에서 이곳, 낙산을 거쳐 왼편에 남산타워가 보이는 남산, 그리고 백악산의 바로 오른쪽에 자리 잡은 인왕산을 거쳐 다시 백악산의 등성이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총길이는 18.6km에 이른다.
1392년, 이전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등장한 조선왕조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궁궐과 주요 시설이 완성된 후 1396년에 한양도성 성벽을 쌓는다.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전국의 군현에 노역을 맡겨 불과 98일 만에 완성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처음에 쌓은 성벽이 완전치 않았기에 30년이 지나지 않아 대대적으로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1422년(세종 4년) 한양도성 성벽은 산지의 부실한 성벽을 고치는 것뿐 아니라, 평지의 토성(土城)도 모두 석성(石城)으로 대체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1704년(숙종 30년)에는 돌을 깎아 성벽을 쌓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벽면을 수직으로 올릴 수 있게 되면서 한층 성벽은 공고해졌다.
[이화마을-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동대문역사공원-DDP]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