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마을-흥인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DDP

대학로에서 낙산 넘어 동대문으로-2

by 길벗 스토리텔러

- 오죽하면 주민들이 벽화를 지워버렸을까

- 이화마을 -

(위) 낙산 정상에서 동대문 방향 하산길 이화마을 입구 (아래) 이화마을 안 적산가옥 골목

'이화마을'은 낙산 정상을 넘어 동대문 쪽으로 한양도성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는 동네이다. 오래된 주택이 많고 특히 일제강점기 후반기에 건축된 단지형 공공 집합 주택-흔히 '영단주택'으로 불리는-이 남아 있다. 이화마을은 장수마을과 비슷한 개념의 도심 재생 사업에 의해 한양도성 성곽과 공존하는 가운데 그 특성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 하에 오래된 동네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주택을 개량하여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과 골목의 계단 등에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화 벽화마을'로 불리며 마을의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바뀐데다, 한양도성 투어의 인기도 한몫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바뀌었다.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계단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참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 관광객들의 소음과 무분별한 관광 태에 분노한 주민들이 계단에 그려진 그림들을 지워버리는 등 행동으로 반발, 현재는 벽화가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 벽화는 없어졌지만, 카페들과 레스토랑들이 많이 들어서 찾는 사람들은 지금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화마을 골목 안 풍경
대학로 방면으로 내려가는 계단들. 계단마다 그려졌던 그림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대학로에서 골목길과 계단을 거쳐 올라오거나, 성곽을 따라 혜화문에서 낙산을 넘어도 되고, 반대로 흥인지문 공원 에서 성곽 따라 올라와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종로구 이화동(梨花洞)이란 동명(洞名)은 지금의 대학로와 동쪽 낙산 사이에 배밭이 있고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학로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에 있는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사저-이화장(梨花莊)- 역시 유래가 같다.

한양도성 밖 창신동 풍경

이화마을에는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암문이 있다. 성 밖으로 나서면 '창신동'이다. 종로에 인접한 쪽과 지하철 6호선이 통과하는 '창신터널' 위쪽에는 아파트들이 꽤 많이 들어섰지만, 아직 연립 주택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뻗은 동네이다. 1970~1980년대에는 동대문시장에서 판매하는 의류를 제조하는 가내 수공업이 매우 활발했으며, 지금도 동대문시장의 주요 생산 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창신동은 조선시대까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과 나무가 울창하여 아름다운 성 밖 동네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으로 활용하여 이곳에서 캐낸 화강암이 서울역 등 근대 건축의 건설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때 돌을 캐내던 채석장-절개지-의 흔적이 서너 곳 남아 있고, 이를 보려는 방문객들이 꽤 많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채석장 전망대'까지 설치되어 있다.


- 이화여대부속병원이 있던 자리

- 흥인지문 공원 -

(왼쪽)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길의 한양도성 밖 풍경 (오른쪽) 전 이화여자대학교병원 본관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는 '서울디자인재단' 건물

이화마을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는 언덕 주변에 있는 ‘흥인지문 공원’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이 있던 자리와 한양도성 낙산구간 성벽을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공원의 윗부분에 우뚝 솟은 건물은 ‘서울디자인재단’ 건물이며 과거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본관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1~3층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들어 있다. 2014년 개원한 박물관은 서울 한양도성의 역사적, 문화적, 건축적 자료와 유물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흥인지문공원과 흥인지문(동대문)

이 공원은 동대문과 두산타워 같은 상가 건물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봄이면 꽃, 가을이면 갈대에 둘러싸이는 도심 속 명소이다. 이곳에서 보면 흥인지문이 마치 로터리처럼 도로에 둘러싸인 섬같은 모습이다. 둘레에 전찻길과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흥인지문의 양쪽 날개 같은 성벽을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흥인지문 뒤의 메리어트호텔은 일제강점기에 생겨서 1968년까지 운행되었던 전차 정거장이 있던 곳으로, 전차 노선 폐쇄 후 동대문종합시장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버스 터미널인 '동대문터미널'이 들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동대문 근처에서 올려다 본 한양도성과 흥인지문 공원의 갈대, 서울디자인재단 건물


-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 각자성석


서울 한양도성을 만들 당시 건축에 참여한 기관, 감독관과 책임기술자의 이름, 날짜 등을 새겨넣은 돌을 ‘각자성석’이라 한다. 성벽의 돌에 글자를 새겨넣었다는 뜻이다.

1호선 동대문역에서 '흥인지문공원'으로 가는 길, 성벽 절단면에 한양도성 각자성석들을 나란히 배치해놓았다.

성벽을 쌓던 조선 초기에는 97개 구간 중 해당 구간의 이름과 담당했던 군현의 이름만 새겼으나, 중기 이후 무너진 성벽을 보수할 때는 담당 기관 등 상세한 사항을 기록하였다. 원래 구간의 시작점이나, 보수 공사 구간에만 있어야 할 각자성석이 마치 이곳이 전시장인 양 배열되어 있다. 그 이유는 최근 성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다른 곳의 돌까지 이곳에 모아 한눈에 볼 수 있게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자성석에 새겨진 글씨들은 시대별로 다른 관리 주체들이 표기되어 있다.


- 한양도성 4대문 이름 중 '흥인지문'만 왜 네글자인가?

- 흥인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대문의 본명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의 옛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의 동쪽 방면으로 출입하는 대문이라는 의미에서 서민들이 편하게 ‘동대문’이라고 불렀는데 본명보다 별명이 더 많이 쓰이게 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문의 양쪽 끝에서 불쑥하게 앞으로 굽어 나와서는 둥글게 껴안은 성벽 형태가 다른 성문들과 다르다. 성문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낙산을 비롯해 한양 동쪽의 지세가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았기에 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3자(字)로 지은 다른 3개 대문(숭례문/崇禮門, 돈의문/敦義門, 숙정문/肅靖門)보다 1자(字) 더 많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문과 달리 '옹성’으로 지은 이유도 특히 군사적 요충이어서가 아니라 지세를 보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으로, 모두 풍수설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옹성(甕城)'은 항아리와 같이 둥근 형태로 성문을 감싸주는 구조라는 뜻으로 적군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정면에서 돌진하는 것을 막아주고 적군의 공격을 분산해서 막아내기 위한 시설이다. 정면에서 안 보이는 출입구는 북쪽 측면에 나 있다. 현재 흥인지문은 1869년(고종 9년)에 거의 신축 수준으로 중건을 했다고 하며, 좌우의 날개 성벽이 헐린 시기는 1907년으로, 전차가 다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흥인지문의 현판은 2행 2자식 현판으로. 정사각형 모양이다.


- 물 위를 성벽이 건너는 방법

- 청계천과 오간수문 -


청계천은 백악산, 인왕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길이 광화문 청계광장 부근에서 삼청동에서 내려온 물길과 합쳐 옛 한양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가장 먼 발원지로부터 약 11km를 흐르다 더 큰 물길인 중랑천에 합류한다. 청계천을 받아들인 중랑천은 한양대학교 근처 살곶이 다리를 지나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중간쯤에서 한강으로 합수된다.

조선시대에는 ‘개천’이라고 불렀고,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1900년대 이후에야 쓰인 것으로 보인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집 없는 사람들이 청계천 주변에 무단으로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서울시에서 대표적인 슬럼지대로 꼽혔다. 1958년 이후 구간별로 단계적으로 복개 공사를 진행하여 차도로 활용하다가, 차도 위에 고가차도까지 건설하여 위아래로 차량이 통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복개한 도로 밑 하천과 고가 차도의 안전성이 문제시 되자, 2003년부터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복개한 도로를 제거한 후 물길을 다시 조성하여 현재와 같은 도심 하천으로 돌려 놓았다. 백악산, 인왕산 등 예전의 발원지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말라, 현재는 여러 곳에서 수돗물을 끌어모아 하루에 일정량씩 방류하는 형태로 물길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양도성 성벽은 청계천 위를 지나갔다. 5칸의 수구(水口)를 가진 성벽 겸 다리(오간수교)를 만들어 물은 물대로 흐르게 하고, 다리 위로 여장(女墻)을 설치했으니 물을 건너는 성벽의 형태 갖춘 것이다.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산책로에 오간수문의 작은 모형물을 설치해놓았지만 글쎄, 누가 저걸 보고 그거라고 짐작이나 하겠나.


- 전국체육대회, 군중대회가 열리던 가장 큰 운동장

- 동대문운동장 터

동대문운동장 터 부근 풍경. 멀리 조명탑이 보인다.

이곳에 있던 동대문운동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시설 복합단지로, 일제강점기인 개장 당시 '경성운동장'이었으나,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전국체육대회' 같은 체육 경기뿐 아니라 대규모 군중 대회도 많이 열리던 서울운동장은 잠실에 '종합운동장'이 개장되자, 거기 '서울'이란 이름을 내주고 '동대문운동장'으로 또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운동장이 아예 사라진 지금은,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서 있다.

과거 동대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있던 '성화대'를 존치하고 있다.
(왼쪽)외관이 마치 동대문운동장의 곡선을 연상하게 하는 인근 상가 (오른쪽)동대문운동장의 흔적을 기념하기 위해 야간 경기용 조명탑 2개를 성화대와 함께 존치히고 있다.


- 운동장 땅속에서 나타난 성벽과 다리

- 이간수문 -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발원, 장충동과 '광희문(光熙門)' 근처를 지나 한양도성 밖에서 청계천에 합류하는 물길(남소문동천) 위에 쌓은 한양도성의 일부이다. '남소문동천'은 오간수문을 통해 한양도성 밖으로 흘러나온 청계천에 합류하는 지류로 보면 되겠다. 이간수문은 서울 한양도성 성벽 건설 직후인 1396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2칸의 수구를 낸 다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일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동대문운동장의 축구장 지표 3.7m 아래 묻혀 있던 유구(遺構)를 발견하여, 복원한 것으로 오간수문처럼 여장을 세우진 않았던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간수문을 지난 한양도성은 현재의 '한양중학교'를 지나 '광희문'에 연결되므로 학교와 도로를 지나는 구간은 멸실된 것이다. 학교 담장 근처까지 도성의 흔적을 재현해 놓았다. 전시장 뒷편에 내려가는 길이 있으므로 가까이 접근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간수문 너머 과거 동대문운동장의 야간 조명탑이 보인다

높이는 약 4m, 폭은 3.3m, 길이는 7.4m이다. 내려가서 보면 물길이 하천 바닥을 깎지 않게 수문 주변에는 넓은 돌들을 깔고, 그 위에 홍예를 세웠다. 물 흐름이 석축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2칸의 홍예로 들어가는 물이 갈라지게끔 뱃머리 모양 유선형 구조로 돌을 깎아 세워 놓았다. 통행금지 시간에 사람들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도성의 개구멍'이 되지 않게 수문에 목책도 설치했다. 홍예 안쪽 돌벽을 보면 목책을 끼워놓게 파놓은 홈도 보인다.

발굴된 유구에서는 흙빛이 나고 복원에 쓰인 돌들은 밝은색이라, 발굴 당시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다


- 조선시대 이곳은?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을지로 6가에서 신당동에 이르기까지 '동대문운동장' 일대 넓은 땅은 '훈련도감(訓鍊都監)' 터였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 설치된 조선 후기 군영의 핵심이다. 그 분영(分營)의 하나인 '하도감(下都監)'의 위치가 바로 현재의 동대문역사공원 자리와 거의 일치하니, '동대문운동장 터에 하도감이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성싶다. 하도감은 군사 훈련뿐 아니라, 무기 제조, 엽전 발행같은 임무를 수행하던 부대였으므로, 많은 건물터와 다양한 관련 유구가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지난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동대문유구전시장’과 '이간수문' 등 야외 유구 전시장,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등을 망라하여 조성한 기념터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 우주선이 내려 앉은 모양인가?

-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그 자리에 2009년 착공해 2014년 개관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이라크 태생의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는데, 그녀가 디자인을 발표했을 때, 동대문과 청계천 등 주위의 전통적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은색 알루미늄 외장 패널 45,133장을 붙이는 공법 자체도 건축비와 운영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측면에서 반대 의견이 많았고. 실제로 건설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선이 동대문운동장에 내려앉은 것 같다”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개관 이후 1년간 8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여 예상보다 큰 관심을 끌었고, 외국인들에게도한국에 가면 꼭 보고 싶은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특히 동대문 쇼핑타운과 맞물려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는 한편, 각종 시설 대여 신청도 꾸준히 늘고 있어 경제적 성과도 우수하다는 평가이다. DDP는 Dream, Design, Play라는 또 다른 의미처럼 패션쇼, 포럼과 컨퍼런스, 세계적 수준의 전시회 등이 열리는 이곳은 디자인랩, 뮤지엄, 아트홀, 디자인장터 등 4개의 특색 있는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2014년 개관을 지켜 본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작고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대학로-혜화문-한양도성-낙산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