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에서 남산 넘어 숭례문으로-1

- 한양도성 따라 국립극장까지

by 길벗 스토리텔러

[장충체육관~한양도성 장충동구간~반얀트리호텔~국립극장~남산둘레길 소나무동산~야생화동산~안중근기념관~숭례문]


- 경희궁 '흥화문'과 쌍둥이인 까닭

-'영빈관' 현판 붙은 신라호텔 정문 -


동대입구역 5번출구를 나서면 장충체육관 광장이다. 오랜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2015년 1월, 재개관할 때 연결 통로와 5번 출구는 새로 만들어졌다.

장충체육관과 주변 장충동 모습

1955년 6월 육군체육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프로레슬링의 김일,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온 김기수, 천하장사 이만기 등 제왕들의 무대요, 농구·배구의 요람이자, 대통령 취임식 등 대규모 군중행사의 메카였다. 장충로 건너 남산 자락에는 동국대학교의 건물들이 단정하고, 약수동에서 넘어오는 동호로 건너편에는 얼핏 교회로 보이지 않는 장충교회의 크고 작은 녹색 건물 두 채가 어떤 메시지를 읽어보라는 듯 마주 서 있다. 뭘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도 같고, 어른과 아이가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체육관 뒤편 면세점 입구도 낡은 건물 헐어내고 잔디 광장으로 단정히 정비하여 한양도성 성벽 안쪽으로 난 순성(巡城)길의 시작 지점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장충체육관 전면은 신라호텔 진입로에 붙어 있다.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는 삼문(三門) 형식의 고풍스러운 문에는 한자로 '迎賓館'(영빈관)이라 쓰여 있다. 이 문에 얽힌 사연을 잠시 짚어보기로 한다.

장충교회 주변 모습과 신라호텔 정문, 장충동 거리 모습

'장충단공원'은 물론 호텔 부근까지 원래는 '장충단(獎忠壇)' 일원이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당시 중전 민씨(후일 明成皇后로 추존)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군부대인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만들어졌다. 당시 사망한 군인들을 배향하기 위해 설치한 추모 시설로, 그 핵심인 제단은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다 한다. 단순히 사당 건물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터에 제단과 부속 건물들을 갖춘 추모 공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장충단을 오늘날 국립현충원의 뿌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는그런 곳에 안중근의사가 처단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기리는 사찰-박문사-을 1932년 완공한다. 박문사(博文寺) 흔적은 얼마 전까지도 남아 있었으니 저 문의 안쪽에 있던 '108 계단'이 그것이다. 2019년 한옥호텔 신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계단은 철거되었지만 2020년 이후 현재까지 공사는 진척되지 않고 있다. '팬데믹'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주요인이지만, '엔데믹' 이후까지 별 소식이 없다가 최근 공사 재개와 관련된 기사들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 한편, 계단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유구들이 발굴되었다 하며, 박문사 건축 이전의 건물지라니, '장충단'과 '남소영'의 시설 아닐까 짐작케 한다.


박문사의 '박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이다. 그걸 지을 때,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을 떼어 와 정문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고종 즉위 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경희궁의 거의 모든 전각이 이건 또는 해체되어 자재로 쓰였으니, 경희궁이 황폐해진 후의 일이기는 하나, 한 나라의 궁궐 정문이 국권 침탈 수괴의 사당 문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광복 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1967년, 그 자리에 국빈 숙소로 영빈관(迎賓館)을 세웠다가, 1973년에 삼성그룹이 인수하여 신라호텔을 만들었다. 내력을 몰랐는지 어쨌는지 흥화문은 그대로 '迎賓館' 현판을 달고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되돌아간다.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원래의 자리에는 '구세군회관 '이 들어서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강북삼성병원 근처 옛 서울고 정문 자리로 이건(移建)했다. 그리고 '영빈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저 문을 과거 이 자리에 재현해놓은 것이다. 외형상 똑같은 문이 '진품'은 신문로에 '興化門'을 달고, 복제품은 장충동에 '迎賓館'을 달고 각기 서 있는 것이다.

(위) 일제강점기 박문사와 그 정문으로 쓰인 흥화문 (아래) '迎賓館' 현판을 단 신라호텔 정문은 흥화문의 복제품

이 탐방 코스는 ‘한양도성 남산(목멱산)구간’ 중 장충동 구간과 남산공원 구간을 포함한다. 처음 장충동에서 성벽 따라 걷다가, ‘남산둘레길’로 성벽길을 벗어나 걸은 다음 안중근의사 기념관 아래 백범광장 부근에서 복원한 성벽을 다시 만나 숭례문에 이르는 노정이다.

신라호텔 후원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성벽 안쪽 순성길 입구

신라호텔 후문/면세점 입구에서 호텔 후원 내부의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계단을 잘 정비하여 개방하였다. 안쪽으로 가면 신라호텔 후원을 구경할 수 있지만, 성벽을 올려다보며 각자성석을 구경하는 재미는 없다. 거긴 성벽 위로 가는 길이니까.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은 총 길이 18.6km의 도성 중 약 1.1km 가량 이어진 성벽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라 한양도성 축조에 관한 여러 상식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성돌에 새겨진 각자(刻字/새김글씨)의 의미는 물론 시대별 성벽 축조의 특징을 비교, 이해할 수 있게 해설이 쓰인 표지판이 많이 서 있다.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의 시작 지점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밝혔다.(한양도성박물관/도성소개)

(위)'경산시면'이라 새겨진 성돌 (아래)'흥해시면'이라 새겨진 성돌

최초 축성 시에는 백악(북악산) 정상부를 기점(基點)으로 숙정문 방향으로 ‘천자문’ 의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97자를 600척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의 돌 하나에 새겼다는 것이다. 순 우리말 길이 단위인 ‘자’는 한자로 ‘척(尺)’이니 ‘자’와 ‘척’은 같은 단위이며, 미터법으로 변환하면 약 30.3cm이다. 그러니 600척은 약 182m쯤 되는 거리이다. 대대적인 개축을 단행했던 세종 때에는 시작 지점 성석(城石/성돌) 중 하나에 지역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18세기 들어 숙종 이후에는 ‘담당 관청/관리 이름/기술자 이름/날짜’까지 새겨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근에서 발견된 성돌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慶山始面(경산시면)’, ‘興海始面(흥해시면)’ 하는 식인데 경산(慶山)은 지명이 오늘날도 그대로인 경상북도 경산시이고, 흥해(興海)는 현재의 포항시 흥해읍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해당 지역의 책임 공사 구간이 시작(作)된다는 의미를 가진 성돌이다.


이 부근에서 '의령시면'이라 새긴 성돌이 발견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재미 있다. 성벽 안쪽 신라호텔에서는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고향이 의령임을 내세워 그 분의 조상이 쌓은 성벽 안에 호텔 자리잡고 있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내용의 홍보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의령시면'이라 새겨진 성돌의 탁본 ※(사진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수차례에 걸쳐 이 성벽 안쪽 면세점 부근에 한옥호텔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서울시로부터 허가받지 못하던 신라호텔 측의 감성 호소형 전략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았다. 지나쳐온 신라호텔 면세점 직원 출입문 쪽을 잘 정비하고, 호텔 후원을 통해 새로 순성길을 터 준 것도 한옥호텔 신축과 관련지어 보는 것처럼. 그와 같은 노력 끝에 한옥호텔은 2016년 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신문 기사 제목의 요약을 제시한다.


`서울 첫 한옥호텔` 5修 끝에 OK/`네 번의 퇴짜` 서울시 5년만에 건립허가/장충동 호텔신라 면세점 땅에 91실 규모로 지상·지하 3층씩…3천억 들여 2022년 완공/한옥美에 현대건축 접목…랜드마크 기대감(2016년 3월 3일/매일경제)


한양도성 순성길을 구간별로 구분하여 부를 때, 이 구간을 '장충동 구간' 이라고도 하고 ‘다산성곽길’이라고도 하길래 대체 장충동과 다산동의 행정 구역 구분이 어찌 되는지 궁금해졌다. 네이버 지도에서 장충동과 다산동의 범위를 검색한 결과를 소개한다. 성벽 따라 이어진 도로-‘동호로 17길’- 우측의 성벽 안쪽은 모두 장충동, 도로 왼쪽 동네는 모두 다산동인데 구불구불한 성벽과 이에 붙은 도로가 이쪽이었다가 저쪽이었다가 소속이 변하고 있었다. 장충동 쪽 분포가 더 많은 듯하나 ‘장충동 구간’, ‘다산동 구간’ 어찌 부르든 모두 무리 없어 보인다. 서울 오래 살았지만 수년 전 첫 순성길에서 본 ‘다산동’은 생소한 동명(洞名)이었다. 찾아보니 동명 변천사도 재미 있다. ‘성동구 충현동’에서 ‘성동구 신당2동’으로 개칭하였는데 아예 행정구가 성동구에서 중구로 바뀌니 ‘중구 신당2동’이 되었다가 2013년에는 인근의 도로인 ‘다산로’에서 이름을 빌어와 ‘중구 다산동’으로 또 개명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간에 암문이 있다. 암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으로 군사적 요충의 산성에서 보는 비밀 문과는 거리가 멀다. 뿐더러 축성 당시 만든 것인지 근래 들어 허물어진 성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주민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인지 조차 분명치 않다고 한다. 2025년 방영된 '닥터 슬럼프'라는 드라마의 많은 부분이 촬영된 곳이 이 부근이라 한다. 암문 주변과 성벽에 기대서 대화하는 장면이 많았다고. 거기 카페로 나왔던 2층 건물은 외장만 변한 채 그대로 있는 것 같다. 암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바깥보다 지대가 높은 성곽 안쪽 길로 이어진다. 신라호텔 면세점 입구의 나무계단을 올라, 신라호텔의 후원을 따라 걸어오는 코스의 호텔 소유 땅이 끝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이 곳부터 성벽 안 길을 걸으면 지대가 높은 만큼 전망이 한층 좋다.

암문 위에서부터 3~4분 정도 여장(女牆) 따라 올라가면 축성 초기에 쌓은 형태를 재현한 성벽과,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고증 없이 복원한 성벽으로 보이는 성벽이 붙어 이어진다. 축성 초기의 것에는 빗물 스며들지 않게 덮은 지붕 모양 '옥개석(屋蓋石)'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정체성 불명의 여장과 조선 초기 축성 기법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연결된 구간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성벽이 아니라 여장(女墻)이다. 바깥을 따라 걸으면서 올려보던 성벽의 축대 부분은 체성(體城)이라고 하고, 체성 위에 쌓은 담을 여장이라고 한다. 여장의 윗부분을 덮은 지붕돌은 옥개석(屋蓋石), 총구를 내밀기 위해 여장에 뚫어진 공간은 총안(銃眼)이라 하는데,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받침 경사를 급하게 만든 근총안(近銃眼)과 상대적으로 먼 거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총을 완만하게 걸치게 만든 원총안(遠銃眼)으로 구분한다.

(위)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이 끝나는 부분, 여기서부터 성벽 멸실 구간이다 (아래) 근처에 있는 '성곽마루'와 표지판

암문에서 약 200m 정도 여장을 따라 오르막길을 걸으면, 성벽이 뚝 끊어진다. 암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체성을 따라 밖으로 온 길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곳부터 계곡 아래를 거쳐 남산 남측순환로 부근까지는 성벽이 멸실된 구간이다. 끊어진 성벽에서 오른쪽 나무데크길로 들어서면 ‘호텔 반얀트리’의 경내인데 그길로 들어서기 전에, 왼쪽에 ‘성곽마루’라 이름 붙은 팔각정 형태의 2층 정자가 있다. 이 쉼터는 남산 풍경과 한남대교 건너 남쪽 풍경 그리고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우뚝한 모습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좋은 곳이다. 그곳에 앉아 반얀트리의 전신인 타워호텔 이야기를 간추려보고 다시 탐방 나서는 것도 좋겠다.


- 타워호텔을 자유센터 숙박동으로 지었다고?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


타워호텔은 1969년 1월 개관하였는데, 신라호텔 앞으로 난 도로-장충로-를 따라 쌓은 축대 위 '자유센터'와 함께 김수근 선생이 설계하였다. 자유센터는 '자유총연맹'의 전신이다. 다음 글을 인용한다.


"타워호텔은 1969년 1월에 개관한 서울 중심부의 특급호텔로,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Banyan Tree Club & Spa Seoul)의 전신이다.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 개최를 위해 자유센터를 지으면서 그에 딸린 숙박동을 만들었는데, 그 숙박동이 타워호텔이다. 건축가 김수근(金壽根:1931~1986)의 작품으로 노출콘크리트의 구조적 성능이 조형언어로 구현된 작품이다. 이 건물은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16개국과 한국 등 17개국이 공산진영에 공동으로 대항했던 역사를 상징하여 17층으로 건축되었다.’-[중구청 홈페이지/중구 문화관광/타워호텔]

성곽마루와 그곳에서 바로보는 남산 풍경

세련되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호텔의 외관은 연실 감는 ‘얼레’를 세운 형태라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제기된 문제점은 호텔 아래 자유센터의 축대를 성곽마루’ 부근부터 끊어진 성벽의 돌로 쌓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김수근 선생에게 따라 다니는 '왜색'이라는 비판 말고 또 하나의 강력한 비난 사유이기도 하다. 멸실 구간의 성벽을 축대돌로 사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허문 것인지, 이미 훼손되어 있는 것을 활용한 것인지는 확실히 모른다고 하지만 어떤 쪽이든 비문화적 행태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반얀트리’는 우리말로 ‘벵갈고무나무(banyan tree, east Indian fig tree)’라 하며 인도 동부가 원산이지만 베트남, 하와이 등 따뜻한 곳에서는 어디든 잘 자라는 나무이다. 옆으로 퍼져나가는 가지에서 받침뿌리가 내리면서 계속 퍼져나가니 ‘옆으로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한 그루로도 숲을 이루는 나무’로 알려진 ‘뱅골보리수’와 종(種/species)까지 같은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풋살장, 테니스장, 인도어 골프연습장 등 체육시설 옆으로 덧댄 잔도 아래로 계곡이 제법 깊다. 끊어진 성벽은 골짜기 아래로 이어지다가, 저 앞 남산 자락 남측 순환로에서 다시 불쑥 솟아 남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일 것이다. 한 가지 알아둘 점. 한양도성 순성(巡城/성벽을 따라 가는 탐방)에 나선 이들이 사유지인 호텔 경내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것은 호텔 측의 양해 덕분이니, 엄연한 영업 공간에 폐를 끼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호텔 본관 아래 주차장에 난 통행로를 따라 빙 둘러 내려가면, 장충단로 건너 국립극장의 모습이 웅장하다.

반얀트리 호텔은 예전에 타워호텔이었다.

반얀트리 앞 횡단보도를 건너 국립극장으로 향하는 진로를 왼편으로 틀어 고개 정상 너머 남소문터를 돌아보기로 한다. 한양도성 축성 당시, 사대문(四大門)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산과 평지가 고르게 분포하지 않는 지형 때문에 문들이 평지 중심으로 몰려 있을 수밖에 없다. 남소문 격인 광희문이 동쪽에 붙어 있으니, 현재의 한남대교 부근에 있던 한강나루(한강진)에서 도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광희문으로 돌려면 너무 멀었다. 이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세조 때 산 위에 남소문을 새로 열었으나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1469년(예종1년)에 폐쇄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소문을 연 해인 1457년(세조 3년), 세조의 장자이자,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懿敬世子/성종 때 덕종으로 추존)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또 폐쇄한 후이긴 하나 예종 자신도 즉위 15개월 만에 사망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여길만도 했으리라. 지금은 고개 정상 바로 아래 한남동쪽으로 표석만 서 있다.(*위의 서술과 달리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된 바도 있다*)

장충단로 고개마루 근처에 있는 '남소문터' 표석과 국립극장

반얀트리 앞에서 길을 건너면 국립극장이다. 국립극장 입구를 지나 남산 순환로 삼거리로 향한다.


다음 편에는 [남산둘레길 소나무동산~야생화동산~안중근기념관~숭례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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