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 따라 걷고 보고-3

경희궁부터 수성동 계곡까지-3(딜쿠샤-인왕산 자락길-수성동 계곡-통인시장

by 길벗 스토리텔러

- 딜쿠샤 -


홍난파 가옥을 지나 ‘구세군 영천교회’ 앞을 지나면 사직터널 남쪽 입출구 위를 지나게 된다. 금화터널에서 고가도로를 지나 발밑의 사직터널로 진입하는 차들과 반대편으로 나가는 차들이 내려다 보인다. 시선을 돌려 가던 길 정면을 보면 얼핏 보아도 수령 수백 년은 되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있고 그 안쪽에 동네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붉은색 벽돌의 2층 주택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위) 구세군 영천교회와 사직터널 위에서 내려다 본 도로 (아래) 인왕산 방향에 있는 동네와 그 사이로 보이는 딜쿠샤

나무 아래에는 나무의 연세가 450년가량 되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과 이 부근이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장군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푯말이 서 있다. 그리고 그 곁, 최근 새 단장을 마친 2층 저택 주변엔 여러 개의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공공성 있는 건물임을 짐작케 한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과거엔 금방 무너질 듯, 삭은 건물이었다. 깨진 창문을 판자로 덧대고, 빗물이 새는 지붕과 벽에 비닐을 씌워 돌로 눌러놓아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았으나, 새 단장을 하여 내부 관람까지 허용하는 저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건물 모서리 화강암 정초(定礎/머릿돌)에 큼지막하게 써있는 'DILKUSHA 1923'이라는 글씨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이 집은 원래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 1948)라는 미국인과 그 부인인 영국인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지어 ‘딜쿠샤’라는 애칭을 붙이고 17년간 살던 집이다.

딜쿠의 이모저모와 은행나무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딜쿠샤)/首尔文伯特,泰勒故居(迪尔座夏)/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1924년에 지은 집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W. 테일러는 운산금광의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897 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에는 AP 통신사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1942년에 조선총독부의 강제 추방에 의해 미국으로 떠났던 앨버트 W.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48년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딜쿠샤는 1942년에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고 공동주택으로 사용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아들 브루스 T. 테일러가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21년에 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광산업 외에 자동차 수입 등 무역상을 해서 상당한 부(富)를 축적했다는 앨버트 테일러는 당시 일본에 지국을 두었지만, 식민지인 한국에 따로 특파원이 없던 미국의 대표적 통신사 AP(Associated Press)의 ‘통신원’을 겸하게 되었던 듯하다. 즉,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1월21일 승하한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왕의 장례일)인 3월3일의 취재를 위해 2월 말, AP에 원포인트로 채용된 통신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AP의 특별통신원이 된 앨버트는 인산일보다 이틀 먼저 일어난 한국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최초로 세계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3.1만세운동 하루 전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도쿄에 있는 지국에 전하는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와 같이 흥미진진하다. ‘호박목걸이’에서 관련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메리는 1919년 2월28일 출산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아들을 낳은 후 간호사들이 종이뭉치를 들고 들어와 자신의 이불 밑에 숨기는 것을 보았다. 저녁 무렵 아들을 처음 보기 위해 병원에 온 앨버트가 그 종이를 읽어보고 '조선의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고는 선언서를 접어 구두 밑창에 숨겨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동생 빌에게 도쿄의 AP지국으로 가져가서 미국 본사에 타전하도록 하였다.(호박목걸이/226~227p 요약) 그렇게 해서 전 세계에 조선의 독립 선언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고종의 장례 취재를 위해 2월28일 통신원으로 특별 고용된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 4월 15일 기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만세운동 가담자 집단학살 사건까지 취재하여 세계에 알린 인물이 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호박목걸이’라는 책에 대해 알아보자.


"메리 테일러가 지은『호박목걸이 Chain of Amber』는 1917년부터 1942년까지 테일러 부부의 서울살이를 기록한 자서전이다.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 1982년 메리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유고를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정리하여 1992년에 출간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호박목걸이’는 메리 테일러가 앨버트 테일러에게 결혼선물로 받은 것이다. 책의 모든 내용은 호박목걸이를 통해 이야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상징성이 매우 큰 자료라고 할 수 있으며, 테일러 가문에서도 귀한 보물로 여겼다. 『호박목걸이』에는 당시 서울사람들의 생활모습, 민속신앙, 금강산 유람 등을 보며 느낀 생각 등 그녀가 조선에 살면서 체험했던 경험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https://museum.seoul.go.kr/)


‘호박목걸이’를 쓴 메리 테일러는 원래 영국 국적의 연극배우였다. 세계 순회공연 중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장 차 이곳에 온 앨버트를 만난다. 1917년 인도에서 공연 중 다시 그녀를 찾아 거기까지 온 앨버트와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 삼아 인도 각지를 여행한다. 여행 중 인도 북동부 ‘러크나우’라는 지역의 인상 깊은 고성(古城)-'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딜쿠샤’가 마음에 푹 담겼던 모양이다. 신혼여행을 마친 그해 바로 조선에 들어와 살다가 1923년 이집을 지어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고 1942년까지 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소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졸지에 교전국 국민이 된 이들이 딜쿠샤에 5개월쯤 구금되었다가 1942년 추방되어 미국으로 가기까지.


1945년 종전 후, 앨버트 테일러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많은 재산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아버지(1908년 한국에서 사망)의 묘소를 찾을 겸 방한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8년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숨진다.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앨버트의 유언을, 두 달 후 메리가 군 수송선을 타고 이 땅을 다시 찾아 양화진에 유골을 묻음으로서 지킨다.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앨버트는 아버지 오른쪽에 나란히 묻혀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그녀가 쓴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가 2014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 87세가 된 브루스가 87년 만(1919년 3월1일 하루 전인 2월28일생)에 자신이 태어난 한국 땅을 찾았다. 테일러 부부의 외동아들이었던 브루스는 독립선언서 이야기를 둘러싼 부모의 이야기를 했고, 창문 너머 서대문형무소가 보였다는 기억과 거대한 은행나무 아래서 놀던 기억을 되새겨, 자신의 생가이자 우리들에게는 정체불명이던 ‘딜쿠샤’의 존재를 밝혔다. 그리고 2대에 걸친 인연은 2015년 4월 브루스가 미국에서 96세로 타계하여 막을 내리는 듯했으나, 이듬해인 2016년 브루스의 딸이자 앨버트와 메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 1958~)가 방한하여 딜쿠샤 유품 1,026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영구 기증함으로써 딜쿠샤는 생생히 복원될 수 있었다. 그렇게 딜쿠샤는 복원되어 3대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인왕산 자락길


초보자가 딜쿠샤에서 인왕산을 타고 오르는 한양도성으로 연결되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은행나무 옆 골목 파란 대문을 들어서기가 남의 집 들어서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 마련이나, 행인들의 공로(公路)이니 조용히 들어가면 된다. 들어서 보면 이 마당의 담장인 양, 한양도성 성벽이 떡하니 서 있다.

(위) 딜쿠샤 옆 골목길과 은행나무 (중간) 파란 대문, 그 안쪽 (아래) 연립 주택에서 보이는 한양도성 성벽

연립주택 마당을 지나서 성벽 따라 경사진 길을 올라가면 마을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우측으로 편의점도 있다. 근방에 양의문교회, 한국사회과학도서관, 종로문화체육센터 같은 큰 건물들이 보인다. 특히 체육센터에 개방화장실이 있다는 고급 정보를 귀담아 두시기 바란다.

(위) 연립 주택 마당과 한양 도성 (가운데) 종로 문화체육센터 (아래) 한양 도성 따라 인왕산 자락 가는 길


쉼터도 있고 인왕산 전체 그림 안내판도 서있다. 이 쉼터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로 피로를 달랜 후, 성벽을 따라 완만한 경사의 보도 이 백 미터쯤 오르면 도성 안쪽과 바깥쪽 동네로 뚫린 암문(暗門)주변에 꽤 큰 규모의 쉼터와 운동 시설, 경복궁 방향 전망대도 나온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전면에 인왕산의 웅자(雄姿), 왼쪽 성벽 너머 안산(案山) 정상, 오른쪽 멀리 북한산 줄기가 뻗은 탁 트인 시야를 즐기며 걷는 평탄한 길이 펼쳐진다.

종로문화체육센터 근처 쉼터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 주변 풍경

천천히 10분쯤만 걸으면 산 중턱에 난 도로를 만난다. 도로 건너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계속 계단을 오르면 인왕산 정상으로 향하고, 도로의 왼쪽 내리막길로 가면 독립문역 방향, 오른쪽 큰길은 인왕산 자락길이다. 우리는 창의문(자하문) 방향 인왕산 자락길을 걷는다.

인왕산 자락길 주변 풍경

5분가량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사직터널 입구와 사직공원 사이에 있는 도로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직 터널 입구에서 단군성전과 황학정을 거쳐 이곳으로 올라오는 도로이다. 삼거리에는 인왕산을 지키는 수호자인 양 호랑이상이 가운데 서 있다. 조선 시대 말, 고종 때까지 호랑이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인왕산의 상징으로 내세울만도 하다.

천천히 길따라 걷다보면 멀리 보이던 인왕산 정상이 왼쪽 어깨 위로 우뚝하다. 인왕산 치마바위에 대한 전설-중종반정과 단경왕후 이야기-과 일제 강점기 저 바위에 새긴 글씨에 관한 이야기는 '인왕산 숲길, 만난 인물들'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수성동(水聲洞) 계곡 팻말이 가리키는 데로 내려간다.

인왕산 자락길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과


수성(水聲)은 한자 그대로 ‘물소리’라는 뜻인데 물소리가 아름답다든지, 우렁차다든지, 어쨌다는 설명 없이 그저 ‘물소리(水聲)’, 그 뿐이다.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수묵화의 여백처럼. 그러나 겸재 정선(鄭敾)의 그 유명한 그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떠올리면 뭔가 집히기도 하는 것 같다. 제명(題名)의 '제(霽)'는 ’비 갤 제‘이다. 며칠간 쏟아진 비가 막 그치긴 했으나, 흠뻑 젖어 검게 보일 정도의 짙은 색으로 우뚝 선 인왕의 면모를 이 계곡에서 올려다본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이곳은 산정(山頂) 바로 아래 있는 계곡이다.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여기 모이고 모여 거세게 하류로 흘러가지 않겠는가. 그 물소리를 우렁차다고 할까, 아름답다고 할까. 멀리에서도 들릴 정도의 물소리를 내는 계곡. 멀리까지도 '물울음'이 울리는 계곡.


안평대군의 집에 아버지 세종대왕이 내린 이름

- 비해당(匪懈堂) -


이 계곡에 세종대왕이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에게 당호를 직접 내린 집이 있었다 전한다. '비해당'. 출전이 시경(詩經) 어디에 나오는 ’夙夜匪懈 以事一人‘이라는데 ’夙夜匪懈‘만 보자면 ’夙-아침 숙, 夜-밤 야, 匪-아닐 비, 懈-게으른 해‘ 아침부터 밤까지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말씀이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덕담으로 누구라도 들을 법 하지만, 대구(對句)의 ’以事一人-한 사람을 섬기라‘는 말 속에는 재주 많고 주변에 사람 많은 셋째인 안평더러 ”딴 맘 먹지 말고 큰형님이자 세자인 문종을 잘 보필하라“는 세종의 속뜻이 들어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당시 임금인 세종이 아들더러 ”나를 잘 섬기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지만, 그냥 ’비해‘라는 두 글자 당호 그대로 게으르지 말고 불철주야 매사에 힘쓰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안 되나.


아무튼 안평대군은 철따라 달라지는 이곳의 풍광을 서거정, 신숙주, 성삼문 등 당대의 문인이 안평대군과 주고받은 시문(詩文)을 엮어 ’비해당 48영(四十八詠)‘이란 작품집의 제명으로 쓰기도 했으며, 다른 저술의 제(題)로도 당호를 즐겨 사용했으니 ’비해당 소상팔경시첩匪懈堂 瀟湘八景詩帖)‘ 등이 그것이다. 안평대군의 또 다른 별서인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여기서 멀지 않은 부암동 주민센터 골목 안에 있으니 일단 그가 천하의 인재들과 교유하면서 예술적 재능을 펼친 배경이 인왕산 자락이었다는 것만은 짐작할만하다.

(위) 수성동 계곡의 기린교와 거기서 본 인왕산 (아래) 안평대군과 비해당에 관한 안내문

그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꿈주인‘이기도 하다. 안평대군이 도원(桃源/복숭아꽃이 만발한 별세계를 말함/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에서 박팽년(사육신 중 한 분)과 노닌 꿈의 광경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림으로 구현한 것이라 한다.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에 붙어 있는 안평대군 본인의 발문에 따르면 꿈의 내용을 설명한 후 삼일 만에 안견이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위해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물이 되었다. 계유정난 당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8일만에 사사(賜死)되었다고 한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속에서 진경(眞景)으로 돌아 온 다리

- 기린교(麒麟橋) -


수성동 계곡을 상징하는 유명한 명소가 된 돌다리 ’기린교‘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넓고 풍광 좋은 인왕산 자락에 ’옥인아파트‘가 있었고 그 아파트 단지를 철거하자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년(숙종 2년)~1759년(영조 35년)]이 그린 실경 ’수성동‘에 등장하는 돌다리가 드러났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시유지인 이곳 수성동 계곡에 1971년 9개동의 시민아파트가 세워졌다. 아파트가 40년 쯤 지나 세월의 무게를 감당 못해 재난위험시설(안전등급 C등급)로 지정되면서 서울시는 아파트 철거와 더불어 인왕산 경관 등을 고려한 생태적 접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2007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된 바 있는 겸재 그림'수성동(水聲洞)'의 돌다리 '기린교'를 그대로 살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아파트 철거 후 단순히 녹지대로 복원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만큼이라도 겸재 그림 속 경관으로 구현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다. 그림에 기린교를 건너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네 사람 이외에 인공적인 시설이 전혀 없음을 감안, 정자 한 동과 다리 2개소를 만드는 정도로 인공 시설 설치를 제한하고 원형을 최대한 살려냈다. 복원 결과 인왕산의 명소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되었으며, [2014 대한민국 국토도시디자인대전]에서 ’서울 종로구-수성동 계곡 복원‘ 프로젝트가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성동과 기린교(麒麟橋)는 그렇게 그림 속 ’진경산수화(眞景山水化)‘ 속에서 진경(眞景)으로 돌아 왔다.

기린교의 실제 모습과 겸재의 '수성동' 그림 속 기린교 주변

계곡 아래에는 산기슭 따라 위아래로 지어진 빌라형 주택들 따라 오르는 계단이 있고 거기를 올라가면 차도가 있는데 그 부근에 헐어버린 옥인아파트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이곳에 아파트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았다. 알려주는 흔적. 1층 한 가구 뒷벽 부분 잔해가 '뻘쭘하게' 서 있다. 사연 모르고 지나가는 나그네는 '이게 뭐지?' 의아해 하시리라. 나무로 된 창틀, 욕실의 정사각형 타일도 아직 반짝반짝하고, 거기 고정시킨 스테인리스 샤워기꼭지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참 어려웠던 시절, 이곳에 사람이 살았구나. 사람의 흔적보다 큰 역사가 어디 있으랴.

(위) 수성동 주변 동네 (아래) 남겨둔 옥인아파트 한 가구의 뒷벽

벽수산장, 윤동주 하숙집터, 박노수 미술관


기린교에서 몇 계단 내려서면 마을버스 종점이 있고, 바로 아래 ’옥인제일교회‘가 서 있다. 이 차도는 사실 개천을 덮어 만든 도로 즉, 복개천(覆蓋川)임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니 지금 걷는 길은 인왕산에서 흘러내린 여러 물줄기들이 모여 깊고 넓어진 개천 위에 놓인 길이다. 이 물길은 흘러가며 또 다른 지류와 합류하다가 지금의 청계광장 부근에서 삼청동에서 흘러내린 또 다른 물줄기와 합쳐 청계천을 이룬다. ’옥인감리교회‘에서 백여 m 더 내려가면 오른쪽 붉은 벽돌 담장에 ’윤동주 하숙집터‘라는 동판(銅版)이 붙어 있다. 동판에는 윤동주가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가량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인 이곳에서 하숙을 했다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리 없는 다세대형 주택이며, 동판에 있는 옛날 동네 사진 속 집도 1941년 모습은 아니다.


인왕산 북쪽 끝자락의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 등 윤동주 테마 명소들도 실은 5개월간 이 터에서 하숙했다는 연고 하나만으로 기획되었다.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시인과의 연고치고는 좀 빈약하다는 느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릴 때 아주 잠시 평양 숭실학교 다니다 간도 용정으로 되돌아 갔고, 연희전문 문과에 다닐 때의 경성 생활은 4년이 전부이니 그 중 5개월이면 짧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2년제 아닌 4년제였다고 하는데, 경성 생활 중 그는 주로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주로 거주했고, 학교와 가까운 북아현동, 서소문에서 하숙한 기간도 꽤 된다. 윤동주가 재학 당시 입주했던 기숙사, ’핀슨관’은 그 역사성을 기려 현재 ‘윤동주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 누상동 하숙집은 1941년 5월 입주, 9월에 나와 다시 북아현동으로 갈 때까지 친구이자 후배인 정병욱 선생과 함께 기거한 것으로 보인다.[윤동주기념관/작가연보(yoondongju.yonsei.ac.kr/)] 기껏해야 5개월간 하숙생활을 했다는 연관성만으로 인왕산과 서촌 일대를 윤동주의 무대로 만든 발상과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위) 되돌아 본 수성동 계곡 방향 (중간) 윤동주 하숙집 터 (아래) 박노수 가옥/종로구립미술관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그 부근 길 왼쪽 골목 안에 잘 지어진 집과 무언가 붙어 있는 철제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집을 밖에서라도 잠시 기웃거려보자.


-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


-박노수 화백의 기증 작품과 컬렉션(고미술품, 수석, 고가구) 등 총 천여점의 풍부한 예술품을 바탕으로 2013년 9월에 설립되었습니다.

-1937년경 절충식 기법으로 지어진 가옥

-1973년 박노수 화백이 소유한 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1991년)로 등록되었습니다.[종로문화재단(https://www.jfac.or.kr/)/문화공간/박노수미술관)에서 발췌)]


남정 박노수 (藍丁 朴魯壽/1927.2.17.~2013.2.25.)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나와 1955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당시 주로 수묵(水墨)으로 일관하던 한국화에 채색을 가미하면서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으로 현대적 화풍을 보여준 화가로 꼽힌다. 이화여대와 서울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기도 했던 박화백은 1973년 이 집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2011년 와병 중일 때, 이 집을 종로구와 미술관 설립을 위해 기증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2013년 2월에 타계하자, 그해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한다.


1937년 경에 지어진 이 집은 1973년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기 전의 스토리가 더욱 흥미롭다. 먼저 이 집은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대한제국 제2대 융희 황제)의 부인이던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지은 대저택 ’벽수산장‘의 일부라는 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이자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의 친형으로, 경술년 강제 합병 조인에 필요한 옥새를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숨기고 내놓지 않자, 조카인 그녀에게 갖은 협박을 다하여 옥새를 빼앗았다는 좀 억지스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공로의 대가로 받은 일왕의 막대한 하사금으로 이곳에 대저택을 지었다는데, 지금의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2만평 가까운)에 걸친 땅을 차지했다고 전한다. 윤덕영의 호(벽수/碧樹)를 따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부른 이 저택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프랑스풍 양관(洋館)을 중심으로 한옥 등 몇 채나 된다. 그 중 양관은 광복 이후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불타 없어졌지만, 1930년대에 딸을 위해 지은 한옥-프랑스식 절충형 가옥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현재의 '박노수 미술관'이다. 그 영역 내 뱃놀이를 할 정도로 큰 인공연못을 만든 자리가 수성동 바로 아래 ’옥인제일감리교회‘ 자리라고도 하고. 벽수산장 구역 안에 윤덕영이 소실에게 지어준 한옥도 현재 남아 있다. 워낙 규모가 큰 저택 안에 놓인 건물들이다보니 이 길을 내려가 통인시장께서 왼쪽으로 돌아 효자동 방면 길가에 당시 저택의 정문을 달았던 기둥도 그대로 서 있다. 윤덕영이 넓디넓은 벽수산장 안 수성동 계곡 쪽에 딸을 위해 지어준 집. 박노수미술관은 그런 사연을 지닌 집이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서 “참 많이 변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북촌이라는 동네가 관광 명소로 뜨고 난 이후 이 동네를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재편할 때, 너무 상업적으로 개발되었다는 북촌에 대한 비판을 답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막상, 내가 보기엔 북촌보다 휠씬 상업적이고 통속적이다. ’마을 재생‘, ’서촌다움‘, ’역사·문화‘ 등 구호는 어디 가고 보이느니 빵집과 음식점이요, 풍기느니 음식 냄새요, 들리느니 ’족발집 사건‘ 같은 자극적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잡음이다. 사람 발길 늘고 장사가 좀 되니 부동산 시세가 오르고, 상식적 수준을 넘긴 임대료에 따른 임대인과 임차인의 갈등.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통인시장 골목 입구가 보인다. ’엽전도시락카페‘라는 특색 있는 시장형 식사메뉴가 시작된 원조로, 시장 안에는 국수 등 저렴하고 서민적 메뉴를 취급하는 작은 식당이 몇 곳 있다. 시장을 통과해 나가면 경복궁역에서 청와대 입구를 거쳐 자하문터널로 이어진 큰 도로-효자로이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으로 가다 보면 여러 유명한 식당과 카페가 있다. 통인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사직단과 배화여대, 세종마을 음식점 거리로 들어설 수 있다. 또 왼쪽으로 가면 서울농학교를 지나 청와대 입구 사거리로 갈 수 있다. 사직단 옆에서 청와대 앞 신교동 사거리까지 이어진 이 도로명은 ’필운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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