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기행 1편-1

김포 애기봉-강화대교-갑곶진-성공회 강화성당

by 길벗 스토리텔러

[김포 애기봉-강화대교-갑곶진-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김상용 순절비-심도직물 터-강화성 북문-연미정]


‘강화도’는 관광 자원이나 역사/문화 자원이 많아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지붕 없는" 어쩌구 하지만, 실상 '맛집과 카페'만 찾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그게 모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 속 장소라는 걸 알면 여행의 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조금만 알고 가면 느낌 다르고 여운이 남는 곳 위주로, 강화도를 3영역으로 구분하여 가이드하고자 한다. 이 글은 그 첫번 째로 '강화읍' 주변 이야기다. 서울에서 육로로 강화섬에 들어가려면 김포 땅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강화 가는 길에 '통행세' 삼아 '김포시'의 명소인 '애기봉 평화생태공원'도 소개한다. 모든 경로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는 도정(道程)으로 설명함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로 북한땅에 빛을 보여주던 자리

- 애기봉 평화 생태 공원 -


‘애기봉(愛妓峰)’은 ‘김포시 월곶면’에 있는 평화 생태공원이다. 이곳이 평화와 생태를 표방한 공원으로 조성된 지는 얼마 안 된다. 애기봉은 원래 6·25 전쟁 중인 1951년 ‘해병대 제1전투단’이 중공군을 격퇴, 사수한 군사적 요충으로 이후 해병대가 철통같이 지켜온 서부전선 최전방 요새이다. 아마도 북한 땅을 보는 전망대 중 가장 짧은 거리에서 북한 마을과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 아닌가 싶다. 1966년 이곳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평안감사와 그의 사랑하는 기생-애기(愛妓)의 못다한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지명(地名) 전설을 듣고 친필로 써준 글씨를 새긴 '愛妓峰'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때 도망 온 벼슬아치와 그 애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성탄절 앞두고 “북녘땅에도 성탄의 축복이 전해지도록 ‘애기봉’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점등되었습니다.”라는 뉴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1971년 18m 높이의 거대한 철탑(등탑)이 세워져, 북녘에서도 보이도록 매년 성탄절마다 불을 밝히던 곳이 이곳인 것이다. 북한에서 심리전으로 받아들여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선전 활동을 중단한다며 33년 만에 등탑 점등을 중단했다. 그러나 천암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자 재점등했다. 이후 점등 문제로 보수-진보 정권과 시민 단체의 갈등의 중심이던 이곳은 2018년 판문점 선언 이후, 등탑 점등, 대북 방송 등을 완전히 멈춘다. 그리고 2017년부터 대대적인 공사에 착수하여 이 공간을 '평화와 생태'를 주제로 재탄생시키기에 이른다. 한강과 임진강이 ‘파주 교하’에서 합류해 강화도로 흘러가는 조강(祖江)-한반도 유일의 남·북 공동 이용수역(Free-zone)-에 위치한 애기봉은 조강(祖江)의 절경과 가까운 북한땅을 조망하는 ‘애기봉생태평화공원’으로 변모하여, 성인 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되었다.


애기봉 전망대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고 입장 수속을 밟는 관리 사무실이 있다. 주차하고 신분증을 제시한 후 출입증을 받아, 버스로 갈아탄 후 전망대로 이동한다. 온라인 예매를 해놓으면 절차가 한결 쉽다. 몸이 불편한 분이 탑승한 차는 그대로 입장할 수도 있다. 걸어서 가도 된다. 한 1.5km 쯤 될까, 20분 남짓 오르내리는 언덕 숲길이 너무 좋다. 완전히 나무 터널이다. 가급적 걸어서 다녀오시라 권하고 싶다. 걸어 올라가는 게 싫다면 버스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만이라도 걸어서 내려오시면 될 것이다. 김포시에서는 봄에 이 길을 걷는 행사도 개최한다 하고, 야간 개장을 한다는 신문 기사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좋은 길인데, 승용차로 3분만에 훅 통과하기엔 아깝다는 말씀이다.

(위) 전시장에서 바라본 조강과 전망대 (가운데) 전망대에서 본 북한땅 (아래) 전망대 주변 모습


처음 가신 분들은 주차장이 지하까지 잘 마련되어있는 깔끔한 건물에 도착하면 이 곳이 전망대인 줄 아시는데 그렇지 않다. 이 건물 안팎에서도 조강(祖江)의 아름다운 물굽이와 그 너머 북한땅이 그림처럼 펼쳐지기는 하나, 이곳은 전시장이고 여기서부터 3백m 쯤 위에 올려다 보이는 또 하나의 건물, 전망대는 따로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화생태전시관‘과 ’조강전망대‘. 외형이나 내부 구조 모두 세련된 최신 디자인의 건물들이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인가 뭐 그런... 알고 보니 거장 ’승효상‘이 설계했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올려다 본 전망대의 꼭대기에 뜬금 없이 ‘스타벅스’ 로고 비슷한 게 붙어 있어, 비슷한 마크인가, 했다. 전망대까지 걷는 길은 허공 위에 잔도(棧道)를 달아 지그재그로 꺾어 돌아 걸으면서 북한땅 풍경과 전시장 쪽 이래 풍경을 번갈아 내려다보게 설계했다. 그런데 도착해 확인해 보니 정말 스타벅스다. 실내는 꽉 차 있고 대기인까지 있었다. 여기가 북한 동네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면, 그쪽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 아니겠나. 거기 ‘스타벅스’라,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다소 삐딱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 덕분인지 방문객들은 젊은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 몽골군이 이 좁은 물길을 39년이나 못 건넜다고?

- 강화대교를 건너는 감회 -


애기봉을 나서 강화읍으로 향한다. 내비게이션에는 ‘갑곶진’을 찍고. 강화대교를 건너며 차창 밖으로 굽이치는 염하(鹽河)를 본다. 다리 길이로 보면 겨우 780m인 이 좁은 해협은, 세계를 말발굽으로 짓밟은 몽골군조차 건너지 못하여, 고려가 39년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생존의 경계였다. 작은 나라 고려가 더 작은 섬 강화로 숨어들었을 때, 몽골군이 끝내 건너지 못한 물길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역사, 병자호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왕실을 이곳 강화로 피신시키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는 강화가 함락되어 가족들이 포로가 되자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을 치른다. 왕실이 섬에 들어간 지 불과 열흘 남짓 만의 일이고, 뒤쫓아온 청군(靑軍)이 공격을 개시한 지 단 하루 만에 벌어진 결과이다.


‘고려가 39년이니 버텼는데 조선은 하루도 못 버텼느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섬 안에서 바닷길을 통해 전국의 세금을 다 받아먹으며 왕과 귀족들만 호의호식하는 동안, 본토의 백성들은 사십 년 가까운 세월, 여섯 차례나 적의 말발굽에 유린당했는데 정권을 쥔 놈들이 항복 안 했으니 나라를 지켰다고 무슨 자랑질 거리가 될까. 고려의 강화 항쟁사를 국가가 아닌 정권(政權)만의 피난 역사라 여긴다면 강화의 자존심을 폄훼하는 것일까. 침략과 생존의 경계였던 염하(鹽河). 그 위에 1970년 최초로 놓였던 '옛 강화대교'는 이제 도보 통행만을 허락한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1997년 새로 놓인 '강화대교'를 건널 때마다 드는 생각 하나. 왜 멀쩡한 바다에 ‘강 하(河)’ 자를 붙였을까. 짠 바닷물이라는 걸 몰랐다면 굳이 ‘소금 염(鹽)’ 자도 쓰지는 않았을 터인데. 실제로 ‘염하’는 조선시대 지리서나 지도에도 등장하지 않는 명칭이라 한다. 근대 들어 일본식 조어(造語)가 스며든 흔적이라 짐작하는 이들이 많다. 혹자는 일본이 우리 바다를 강으로 강등시키려 했다 주장하기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그저 지명 없던 곳에 식민지 시절 처음 붙인 이름을 관습적으로 써온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게 상식적이지. 물길이 워낙 세고 좁아서 마치 강처럼 보여 예로부터 ‘강화강(江華江)’이라 했다는 요지의 글을 본 적도 있다.


- 진(鎭)과 진(津)의 차이.

- 갑곶진(甲串鎭)과 갑곶돈대 -


먼저 ‘갑곶돈대’를 찾는다. ‘갑곶돈대’에는 ‘강화전쟁박물관’이 함께 있다. 입장료는 1,000원 정도. 주차비라 여겨도 좋을 액수이다. 돈대는 해안가나 국경에 돌과 흙으로 쌓은 시설로 관측과 방어의 기능을 수행한다. 조선시대에 강화 해안에 쌓은 돈대가 53개나 된다고 하는데, 갑곶돈대는 육지와 강화를 잇는 가장 중요한 물길이자 군사적 요충에 쌓은 시설이므로 그중에서도 일찌감치 구축되었다. 몽골군과의 대치 장소도,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할 때 건넌 곳도 '갑곶'이었던 이유는 강화해협에서 폭이 가장 좁은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 '갑곶'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영향권 아래 들어간 이후 그저 무난히 지내던 이 갑곶진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사건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발이다. 강화도로 진격한 프랑스군 600명이 갑곶진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는 한편 건너편 문수산성까지 공략한 침략 사건이다. 이후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억지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기 위해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강화전쟁박물관'. 규모도 작고 볼 것도 별로 없지만, 주로 침략 당한 전쟁의 역사가 테마인 장소이다. 그리고 최근 복원해놓은 강화 갑곶진(나루)의 ’진해루‘를 보러 이동하기로 하자. 강화대교와 좁고 긴 바다의 이쪽저쪽을 내려다보며 갑곶나루로 내려가는 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해를 위한 요점 정리 하나! ’진‘하면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되기에 설명이 필요하다. ’나루 진(津)‘을 쓰면 그냥 나루고,’진압할 진(鎭)‘을 쓰면 중요한 나루에 있던 군부대라는 사실. 그러니 '진(鎭)'은 나루와 수군 진영을 겸하는 것이다. 부산진, 정동진, 주문진, 노량진, 양화진.... 갑곶진(甲串鎭)은 나루 포함 갑곶돈대를 포함한 수군 진영을 의미한다. 내가 공부하기로는 ’갑곶진(甲串鎭)‘의 지휘를 받는 산하 돈대는 3곳이다. 그중 갑곶돈대가 가장 요충(要衝)이고.


- 천주교 순교 성지가 왜 이곳에?

- 갑곶나루는 갑곶진 -


주차장에서 갑곶돈대의 담장과 천주교 ’갑곶순교성지‘ 사이로 올라서는 낮은 언덕길이 있다. 그 언덕을 조금 올라가서 전방을 바라보면 강화해협과 그 위에 놓인 두 개의 ’강화대교‘, 그리고 건너편 ’문수산‘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 옛 다리는 자전거와 사람의 통행만 허용되니 몇 걸음이라도 디뎌볼 수는 있다. 그러고 보니 주차장에서 이 도로로 올라서는 길목에 커다란 돌에 ‘開國의 聖域 江華'-'개국의 성역 강화'라 새겨져 있다. 단군이 마니산 꼭대기에 '참성단(塹城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전설,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았다는 전설 등이 관련된 강화의 역사성을 내세운 글이다. 근데 왜 이곳에 저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을까. 이 좁은 도로가 ’구 강화대교‘로 진출입하는 오직 길이었던 그때,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뿌리'라는 자긍심을 보여주기 위해 설치했음이 분명하다.

(위) 갑곶돈대 주차장과 강화 표지석 (가운데) 신구 강화대교 (아래) 통제영 학당 표지석과 진해루 건축 공사 당시 모습

갑곶나루로 내려가기 위해서 ’강화나들길‘의 일부인 나무데크길을 따라 해협을 내려다보며 걷는 것도 좋지만, ’갑곶순교성지성당‘을 지나는 것도 좋다. 성당 내부의 순교자 관련 이야기도 우리 역사의 일부이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1871년 일어난 ’신미양요‘는 미국 함대의 침공 사건이다. 5년 전 평양 대동강에서 벌어진 ’제너럴셔먼호사건‘의 보복이라는데, 상세한 설명은 다음 편에서 ’광성보‘를 이야기할 때 더 필요한 대목이니만큼 생략한다. 신미양요로 조선의 군사가 전멸한 절대 패배를 안겨 준 미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가자, 흥선대원군 정권은 천주교 신자들이 미군과 내통했다는 구실을 걸어 세 사람의 신자를 처형한다. 미군들은 광성보 전투 이후 돌아갔으니, 갑곶진까지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육지에서 들어오는 관문, 사람 통행 많은 이곳에서 보란 듯이 처형한 것이다. 이런 정도로 순교 성지가 갑곶에 세워진 이유를 이해하고, 잘 꾸며놓은 언덕을 따라 ’갑곶나루‘에 내려서면 최근 복원한 ’진해루‘를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아예 없던 성문이 떡하니 바다를 향해 서 있다. 해협을 건너 강화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고 소개되어 있는데, 만들어만 놓고 찾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 양하다. 건축 중에도 와 봤고 완공 이후에도 와 보았으나, 늘 찾는 이 없어 주변이 썰렁했다. 검색해 보니 "문화재청에 역사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수십억 원을 들여 복원해 놓고는 관리도 안 한다"는 비판이 실린 신문 기사가 보인다.


얼핏 순교성지성당 경내에 있어 순교 관련 기념물인줄 알지만, 가까이 가서 안내문을 읽어 보면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된다. '통제영학당지(統制營學堂址)'. 관련 내용을 요약한다. 1893년(고종 30년)에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 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하여, 영국군 장교 등 교관진을 초빙하고 160명의 1기 생도를 선발하여 훈련에 매진했으나, 청일전쟁과 일제의 간섭으로 개교 1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갑곶에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이다. 이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앞으로 당시 건물을 복원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한다.


- '풍물시장' 밴댕이도 좋고 '관청리' 젓국갈비도 좋다

- 강화읍에서의 점심 식사 -


강화읍 안의 여러 곳을 탐방하는 일정이라 몇 곳을 이동하든 읍내에서의 이동 거리는 짧다. ’강화대로‘를 따라 가다 강화읍 중심가로 진입하기 바로 전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강화풍물시장‘이 있다. ’강화버스터미널‘ 근처이다. 이곳은 강화읍을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시장과 식당가를 겸한다. 2층에 올라가 보면 많은 식당들이 구획을 나누어 성업 중인데, 메뉴의 주재료는 ’밴댕이‘다. ’밴댕이 회, 밴댕이 구이, 밴댕이 무침‘을 세트로 파는 2만원 안팎의 메뉴가 가장 인기 있는 걸로 보인다. 식사 뿐 아니라 술안주까지 겸할 수 있는 메뉴라, 많은 분들이 주문하시는 것 같다. 이곳 아니면 다음 목적지 부근인 ’용흥궁공원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식당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이곳은 ’경찰서‘, ’읍사무소‘가 가깝고 ’군청‘도 멀지 않은 입지라 오래되고, 알려진 식당들이 많다. 강화의 명물이라 미디어에 많이 소개된 ’젓국갈비‘로 유명한 식당들도 이곳에 있다. ’성공회강화성당‘과 ’용흥궁‘, ’김상용 순절비‘, ’삼도직물 터‘가 주차장을 에워싸고 있으니 용흥궁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면 주차, 점심식사, 탐방 코스를 한 코에 꿸 수 있다.


- '천주교 성당'도 근처에 있으니 '성공회 성당'임을 잊지 말 것

- 성공회강화성당 -


’한옥성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천주교‘가 아니라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성당. 성공회는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 종파의 하나이다. 영국 헨리 8세 때 교황에 대항하여 종교의 수장을 국왕이 겸한다는 소위 ’수장령‘과 ’천일의 앤‘ 이야기 등이 배경으로 떠오르는 영국의 국교. 1890년 ’Charles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 주교‘가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딤으로써 선교를 시작한 성공회는 서울과 강화도, 충청도 일대를 선교 거점으로 삼는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강화도에서의 선교 활동은 성공적이어서, 10년만인 1900년 ’강화읍‘에 ’한옥 성당‘을 세우기에 이른다.


정면 계단을 올라 3문 형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자면, 사찰의 사천왕문 같은 구조의 문을 또 거치게 된다. 두 문 모두 3문 형식이니 외삼문(外三門), 내삼문(內三門)이라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3칸 중 가운데만 출입구고 양쪽은 막힌 구조이다. 내삼문 격의 출입문 왼쪽 공간에 작은 동종(銅鐘)이 걸려 있으니 거기가 종각(鐘閣)인 셈이다. 용뉴(龍鈕), 연꽃과 전통 무늬 등 사찰의 범종 형태와 거의 같으나 성공회 특유의 ’캔터베리 십자가(Canterbury Cross)‘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당목(撞木)이 걸려 있지 않으니 아마 타종봉(打鐘捧)을 손에 쥐고 소리를 울릴 것으로 보인다. 예배 시에만 울리는 종이니 아무나, 아무 때나 치지 말라는 당부의 글도 적혀 있다. 이 종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다. 1914년 영국에서 주조된 종을 기증받아 걸었으나,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제가 전쟁 물자 부족으로 ’금속 공출’해 간 후로 오랫동안 종이 없었는데 1989년, 영국 성공회 성도들과 영국의 선교사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강화성당 종 복원'을 위한 성금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에 한국의 신자들도 적극 동참하여 강화성당 축성 89주년 기념일에 맞춰 봉헌식을 거행하고 45년 만에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본당은 중층의 팔작지붕을 이고 있어 마치 불교 사찰의 대웅전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본당의 출입문이 건물의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옥 외관은 살리면서도 내부에는 바실리카 양식의 길다란 ‘삼랑식(三廊式)’ 구조를 구현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바실리카 건축‘은 고대 로마의 공공 건물에서 유래하여 전통적인 성당 건축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 잡은 평면 구조로, 두 줄의 기둥으로 구획된 세 칸-’삼랑식 공간‘ 등이 특징이다. 한옥 구조 안에서 이러한 바실리카 구성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예배 공간인 ’중앙랑‘과 그 양쪽의 ’측랑‘을 나누고, 중앙랑의 높은 천장과 측랑의 낮은 지붕이 이루는 대비, 그리고 중층 지붕 사이에 마련된 채광창 등에서 성당 특유의 고딕식 공간 구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고딕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의 요소를 모두 갖추기엔 한옥의 구조 상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1926년 서울에 주교좌성당이 세워져 전국의 중심 성당으로 자리매김하기 전까지는, 이곳 강화성당이 사실상 한국 성공회의 중심 성당 역할을 했다고 한다.


들어가 보고 싶으면서도 주저하는 방문객들에게 안내를 맡은 신도께서 들어오라고 권하며 이런저런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신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마루 위로 올라서야 하니 예전에는 신발을 벗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루에 올라서면 입구에 '성수대'가 있고, ’중앙랑‘의 천장에는 화려하고 밝은 빛을 내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전통 한옥의 나무 천장 구조와 서양 성당의 디테일이 한눈에 드러나는 장면이다.

성공회강화성당의 이모저모/첫번째 사진(정문)과 마지막 사진(사제관 출입문)의 '캔터베리 십자가'도 태극 문양을 배경으로 그렸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드리는 tip. 강화도에 있는 성공회 한옥성당은 이곳 말고 ’길상면 온수리‘에도 있다. 한옥이라는 점은 같아도 '온수리 성당'은 중층 지붕도 아니고 단청도 없어, 여염집 분위기가 나서 친근하게 느껴지는 한옥이다.


[용흥궁-김상용 순절비각-심도직물 터-강화성 북문-연미정]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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