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기행 1편-2

용흥궁-김상용 순절비-심도직물 터-강화성 북문-연미정-강화대교

by 길벗 스토리텔러

[김포 애기봉-강화대교-갑곶돈대-성공회 강화성당-용흥궁-김상용 순절비-심도직물 터-강화성 북문-연미정-강화대교]


- ’강화도령‘과 ’용이 나신 집‘

- 용흥궁 -


용(龍)이 일어난 곳. 용흥궁(龍興宮) 한자를 해석하자면 이렇다. 농사꾼으로 전락한 왕가의 후예가 왕좌에 올랐으니, 용이 꿈틀 일어난 집이 맞다. 용흥궁은 한옥 성당 정문 계단 앞 작은 골목길을 두고 마주한 돌담 안에 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가깝다. 왕으로 등극한 후에 궁(宮)자를 붙인 큰 기와집을 지어 높여 부른 것으로, 철종이 ’촌놈‘ 시절에는 아예 꿈도 못꿨던 고대광실이다. 왕이 된 후 4년 쯤 지나, 강화유수가 임금이 살던 집터에 최초로 기와집을 지어 ’용이 나신 곳‘이라 이름 붙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보수와 중건을 거쳤다고 한다. 언제 지었는지 몰라도 지금 '용흥궁'은 흉내만 내어 지은 티가 역연하다. 구조도 관리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주민들을 위한 강좌도 이 집에서 여는 듯, 어느 문화 단체의 문패가 감히 왕이 나신 집 문설주에 붙어 있다. 더도 아닌 덜도 아닌 그저 영화 세트장 정도.


철종(1831–1864)은 조선의 제25대 왕으로, 후사 없는 ’헌종‘의 뒤를 이어 “갑툭튀” 왕위에 오른 인물이며,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또 방계 혈통에서 "갑툭튀" 등극한 ’고종‘의 전임자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사도세자의 서자로는 두 명의 후궁이 낳은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그들이다. 그 중 은언군의 혈통에서 '철종'이 나오고, ’은신군‘의 양자로부터 26대 왕 ’고종‘까지 나오니 조선 후기의 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의 방계 후손으로 채워지는 셈이다. 은언군은 왕족으로 좀 방탕하고 자질이 경솔하여 할아버지인 영조의 눈 밖에 났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도 영조 사후 형님인 ’정조‘가 많이 보살펴주어 그런대로 무난히 살아가던 시절도 있던 모양인데, 아내와 며느리(큰아들 상계군의 아내)가 천주교 신자로 신유박해 때 처형 당하고, 큰 아들 상계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강화로 유배된다. 불행한 왕족인 그가 용상(龍床)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왕족이라고는 씨가 말랐고, 안동 김씨‘ 세도가(勢道家)가 그저그런 만만한 인물을 옹립하고자 했다는 배경 등이 제시된다. 역모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삿된 종교에 빠져 줄줄이 처형 받은 죄인의 집안에서 왕을 옹립하려니, 무리수를 둔 흔적도 보인다. 새 임금의 가계에서 죄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실록‘뿐 아니라 ’승정원일기‘, ’일성록‘까지 고치거나 지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증조부인 은언군이 역모에 휘말려 강화도로 유배 가고 사약을 받았던 과정. 아버지 전계군이 강화도에서 관노(官奴)처럼 비참하게 산 기록, 전계군의 모친과 형수가 천주교 관련 사단으로 사약 받은 일. 그 기록들을 세초(洗草)한 것이다. 세초는 한지에 쓴 먹물 글씨를 물에 빨아서 지우는 작업이다. ’승정원일기‘의 은언군 관련 내용은 워낙 많기도 하지만, 세초가 잘 안되는 대목이 있어, 기록된 페이지를 칼로 도려내거나, 고쳐 쓴 종이를 덧붙이기도 한 흔적이 역력하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철종을 후계로 지명한 당시의 최고 실권자인 ’순원왕후‘의 지시였다고 보는 것 같다. 순원왕후는 23대 왕 순조의 비(妃)이자 ’3대 연속 안동 김씨 왕비‘ 시대의 첫 주자로 그 집안 세도정치의 버팀목 역할을 한 인물이다.

image.png (위) 용흥궁 앞 골목과 대문 위 현판 (아래 왼쪽) 용흥궁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과 공덕비들 (아래 오른쪽) 용흥궁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성공회 강화성당

어쨌든 “갑툭튀” 왕이 된 그는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인 ’철인왕후‘와 혼인하나, 그들도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철종의 정비이며, 고종 시대까지 15년이나 ’대비‘로 후덕하고 조용히 살았던 그녀를 느닷없이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소환하여 코메디의 주역으로 만들었는지는 정말 모를 노릇이다. 철종이 등극 전 살아온 모양새가 보잘 것 없으니, 상상력을 동원한 각종 라디오 드라마, TV드라마, 영화 등이 난무했다. '가짜 역사'의 산실들이다. 제목만 훑어봐도 ’임금님의 첫사랑‘, ’강화도령‘, '연실이' 등등에, 내용인즉 '왕이 되기 전 사귀던 여인을 그리워하여 밥도 안 먹고 어쩌구, 촌놈으로 살아서 글도 몰랐다.... ' ’극(劇)‘이라는 장르는 ’극적(劇的)‘으로 만들수록 재미있고 자극적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걸 진짜 역사로 믿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도 가져야 하지 않겠나, 관련자들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높은 수준의 허구를 지어낼 자신 없는 사람들이 엄연한 역사를 가져다가 손쉽게 비틀어 만드는 건 창작이 아니라 '역사 표절'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뒷날 전계대원군으로 추숭)‘은 물론 철종까지도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란 엄연한 왕족인데 글을 모르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말이다. 제왕학(帝王學) 정도라면 몰라도. 현재 남아 있는 철종의 한문 글씨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평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철종이 강화도로 조부따라 귀양갈 때 나이가 14세였다는 사실도. 용상에 오른 건 19세. 한양에서 왕족으로 14년, 강화 촌놈 생활 5년. 나무꾼, 농사꾼으로 적응할 시간이나 있었겠나.


- 온 가족이 함께 폭사한 충절

- 김상용(金尙容) 순절비 -


용흥궁에서 나와 주차장 출구 쪽에 두 개의 비석이 안에 서 있는 비각(碑閣)이 있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는 비들이다.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으로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으나, 강화성이 청군(靑軍)에 함락되자, 가족들과 함께 자결한다. 김상용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의 지은이이자, 척화파의 거두로 유명한 당시 예조판서 ’김상헌‘의 친형이다. 형은 강화도에서 폭사(爆死)하여 순절하고, 동생은 항복을 반대한 죄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4년 넘게 억류 당한 것이다. 비석에는 왕실의 종묘와 빈궁, 원손을 보호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의 상황-본 강화수비대의 안일한 전투 대응-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자, 전 가족들과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폭사하여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 2기의 비가 서 있는 이유가 재미 있다. 하나는 '순조' 때 김상용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으로 원래 비각 안에 제자리에 서 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전인 '숙종' 때 건립한 것인데 새 비석으로 대체할 때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원래 김상용이 순절한 강화산성 남문 부근에 세워져 있던 비각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땅 속에서 이전 비석이 발견되자, 현재 두 비석을 한 비각 안에 세웠다(일각이비/一閣二碑)는 이야기다.

(위/왼쪽) 김상용 순절비 (위/오른쪽)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 (아래/왼쪽) 심도직물 터 흔적 *이 사진은 '강화군, 문화관광*에서 모셔옴 (아래/오른쪽) 강화산성 북문-진송루


-경제 부흥의 터전과 노동 착취라는 동전의 양면

- 심도직물 터 -


한옥성당과 용흥궁으로 올라가는 골목 모퉁이. ’김상용 순절비‘와 등을 지고 한옥성당 쪽을 바라보는 곳에 색바래고 금 간 낡은 굴뚝이 서 있고, 유리함 안에 큰 기계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보존물은 ’용흥궁공원‘과 주차장 일대가 우리나라 면직물 산업을 선도하던 ’심도직물(沁都織物)‘의 공장터라는 사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가내수공업 형태로 시작된 강화도의 면직물 산업은 일제 강점기에 공장화되기 시작했고, 해방 후에는 심도직물 외에도 수많은 직물공장이 세워졌다. 1960~1970년대에 이르면 강화의 인조견 생산량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만큼 호황을 누렸으며, 60여 개 공장에 노동자 4천 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성장했다. 당시 강화 경제의 80%가 직물업에 의존할 정도였다는 것. 심도직물은 해방 후인 1947년 설립되었으나 선행 주자들을 제치고 1970년대 방직기 210대, 노동자 1200명의 대규모 회사로 성장하여 면직물 산업 전성기의 선두 주자가 된다. 고도 성장의 이면에 어찌 무리와 희생이 없으리요. 여성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노동 환경과 근로 조건, 저임금 문제가 이슈로 부상한다. 1967년 심도직물의 노동자들이 권익 보호를 위해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의 지원으로 노조를 결성하자 사측은 이를 탄압했고, 이에 천주교계가노조에 힘을 보태면서 심도직물 사태는 전국적인 인권 운동 문제로 확산되었다. 이제 1970년대 한국 민주 노조 운동의 선구적 모델이 된 이 노동 운동-’심도직물 사태‘라 부르는-은 한국 노동 운동사의 우뚝한 이정표로 남았다. 저 굴뚝과 기계는 강화도 면직산업의 기수로 용흥궁공원 전체를 차지하던 ’심도직물‘의 터를 알리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강화/직물산업/역사의 현장/심도직물을/기념하며..”라는 팻말과 ’심도직물의 유래‘, ’1970년대 심도직물 거리 전경‘ 기록물과 함께. 그리고 ’심도직물 노동조합 및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활동 기념비‘라는 조형물도 이 터에 세워졌다. 이곳에 심도직물이 있어 우리나라 경제 부흥에 이바지 했다는 자부심, 1960년대 엄혹한 시대에 최초의 노동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강화도 뿐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역사이다.


- 문패를 ’고려궁지‘가 아니라 ’강화유수부‘로 바꿔야

- 고려궁지와 강화산성 북문 -


’용흥궁공원공영주차장‘에서 나와 강화산성 북문을 향해 언덕길을 올라간다. 걸어서도 멀지 않으나 하루 일정으로 둘러볼 곳이 많아 시간 관리 상 승용차로 올라가는 것이다. 강화초등학교 정문 앞과 ’천주교 강화읍성당‘ 앞을 지나면 오른쪽에 ’고려궁지‘와 주차장, 매표소, '궁지'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보인다. '대몽 항쟁' 시기에 강화로 피신했던 고려 조정의 궁궐터라는 건데, 일단 궁궐이 이렇게 작을 리 없다는 의문이 든다. 39년이나 머물렀던 곳이고, 당시에는 피난 수도임에도 왕실과 대신들은 고대광실 집을 짓고, 연일 잔치를 베풀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적어도 이 부근의 행정구역인 ’관청리‘ 전체 정도가 궁지(宮趾)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상식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 터를 발굴했을 때, 정작 고려시대 유물은 거의 나오지 않고, 조선시대 관아 유적이 쏟아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자리라는 것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외규장각이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와 조선시대에 그려진 ’강화지도(江華地圖)‘에 나와 있는 외규장각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하므로, 유수(留守)의 집무실인 동헌(東軒) 바로 뒤에 외규장각을 복원하기에 이른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성를 점령한 프랑스군이 조선군 지휘부인 강화유수부 경내에서 뭔지 품격 있고, 귀한 것이 들어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는데, 그게 바로 외규장각이었으리라. 프랑스군은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1,000여 권의 서적과 왕실 민속품들을 전리품으로 취했다. 그 속에 '조선왕실의궤' 297권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거기 그치지 않고, 프랑스군은 철수하면서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유수부 건물들에 불을 질러 나머지 의궤와 서적들이 모두 태워버린다. 가슴 쓰린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고려궁지'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물론 고려 궁궐이 있던 자리에 수백 년 지나 조선의 관아가 자리 잡는 일이 이상할 일은 없다. 그러나 ’고려궁지‘의 중심이 아니라는 반론이 많고, 복원되긴 했으나 뭔가 고증이 부실한 데다 넓은 잔디밭에 고작 두어 채의 신식 한옥 건물만 달랑 서 있는 이곳은 관람을 권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그렇다는 사실만 알려드릴 뿐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강화산성 북문‘이다.


- 봄에는 벚꽃 터널, 가을에는 단풍길

- 강화산성 북문 -


강화산성은 하나의 성벽이 아니라, 섬 전체를 3단계로 에워싸는 입체적인 방어 체계이다. 보통 '강화산성'이라 부르는 구간은 궁궐을 둘러싼 약 7.1km 길이의 ’내성(內城)‘만을 말한다. 그 외곽에 ’중성(中城)‘도 있었지만 현재 극히 일부 흔적만 남아 있어 내 수준에서 언급하기 어렵다. 외성(外城)은 적이 바다 건너 상륙하는 것을 1차로 막기 위해 강화해협(염하)을 따라 쌓은 약 23km의 장대한 성벽이다. 그렇게 긴 성을 어떻게 쌓았을라구 하는 의심은 섬의 해안 따라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보(堡)와 진(鎭과) 돈대(墩臺)의 성벽들을 모두 연결시킨다 생각해보면 단번에 싹 가신다. 아까 들렀던 ’갑곶진‘의 ’진해루‘가 외성의 상징적인 대문이었을 것이다. 육지에서 건너오는 공식 나루였으니 말이다. 3중의 강화산성은 ’대몽골항쟁기‘에 최초로 쌓았고 조선시대까지도 꾸준히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산성 북문 현판에는 ’鎭松樓‘라 적혀 있다. '진송루'. 시멘트로 지었다고 혀를 차는 사람도 봤으나 내 생각은 아주 다르다. 배곯고 남루하던 시절, 산에는 제대로 자란 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려웠던 시절 제대로 쭉 뻗은 귀한 소나무를 수십 그루 장만하여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했겠냐는 말이다. 먹고 사는 모든 것이 버거웠던 그때, 시멘트로라도 폐허가 된 터에 성문을 다시 세워 올릴 생각을 한 그 역사 문화 의식에 오히려 박수를 쳐야 옳지 않겠는지. 비록 원형은 아니지만, 저 시멘트 성문이라도 지금까지 버텨주었기에, 비로소 다음 세대에게 본격적인 복원의 과제를 넘겨줄 수 있게 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1977년 강화 전적지 보수 사업을 통해 복원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돈대, 고려궁지, 강화성의 다른 성문 등이 모두 같은 흠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강화산성 북문 앞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주차하기에도 좋다. 겉으로 보기에 이곳은 고즈넉한 풍경의 분위기와 강화산성의 성 구축 체계를 알아보는 역사 공부 정도의 의미 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봄가을이면 꽃구경과 단풍구경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 얘디는 달라진다. 봄이면 고려궁지 앞에서 북문까지 이어진 800m의 벚꽃 터널과 조명 속 ’밤 벚꽃‘의 명소이다. 사람이 많아 승용차로는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찾는 이가 많다. ’용흥궁공원주차장‘이나 그 부근 어디 좀 먼 데라도 주차하고 걸어 올라와도 걸음품이 하나도 안 아깝다. 그리고 가을엔 차분한 단풍 감상의 명소로 꼽힌다. 중요한 tip 하나 드린다. 한자로 ’鎭松樓‘ 현판이 붙은 북문은 늘 열려 있고 안팎으로 사람의 통행이 가능한데 거길 통과해 내려가면 가을 산보 코스로 그만이다. ’온통 은행나무‘ 수준은 아닌데, 길에는 밟히는 은행잎이 수북하다. 언젠가 강화도 북쪽에서 네비게이션에 ’강화산성 북문‘을 치고 왔더니 가파른 외줄기 산길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좁은 길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오니 북문의 외곽이었다. 네비게이션이 단순하게 가까운 길을 알려준 결과 의도도 안 했던 성밖 마을 풍경을 만끽하게 된 날이었다. 다시 용흥궁 쪽으로 내려가는 길, 고려궁지 바로 전에 도로 곁에 서 있는 22m의 은행나무 고목 구경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강화관청리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32호)' 700년 이상의 연세를 드신 은행나무시다. 이제 강화읍 주변 여행 마지막 코스인 연미정으로 향한다.


- 제비 꼬리같은 양갈래 물줄기를 굽어보는 정자

- 연미정 -


용흥궁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화산성 동문(東門)이 있다. 동문과 강화중학교를 지나치면 바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그렇게 차로 달리면 10분 내에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강화해협 북쪽에 있는 바다와 월곶진(月串鎭) 성벽, 그 성문인 조해루(朝海樓)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주차장은 한가하다. 차를 세우고 ’월곶돈대‘를 향해 올라가면 잔디 언덕에 황형 장군의 옛집터 기념비가 서 있다.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 장군. 조선 중종(中宗) 5(1510)년 발생한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고, 무장으로서 함경도 지방의 야인(野人)을 진압하는 등 큰 공을 세워 무관인데도 공조판서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삼포(三浦)는 일본과의 원활한 무역 거래를 위해 왜인의 거류를 허가한 부산포(부산), 내이포 또는 제포(진해), 염포(울산)의 세 항구를 일컫는다. 거기 살던 왜인 거류민이 늘어나면서 규정을 어기고 제멋대로 활동하다 이를 규제하자, 불만을 품고 조직적으로 일으킨 폭동이요 반란이 ’삼포왜란‘인 것이다.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황형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로 긴급 보임(補任) 받아 제포로 진격하여, 가장 왜구의 세가 강하고 격렬했던 그곳의 왜인들을 진압한다. 훗날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강화읍에 집과 이곳의 연미정을 하사 받아 여기서 만년(晩年)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월곶 돈대‘는 엄연히 군부대인데 부대 안에 있는 정자를 하사하다니 그게 말이 돼? 조사해 보니 깔끔한 답이 있었다. 황형에게 연미정을 하사할 당시에는 돈대가 없이 경치 좋은 곳에 세운 정자일 뿐이었다는 것. 월곶돈대는 숙종 때인 1679년에 군사적 요지라 판단하여 연미정 주위에 쌓은 것이라 한다. 강화 해안 방위를 위해 53돈대로 확장하여 방어 체제를 완성한 시기가 숙종 때임을 떠올리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황형 장군의 후손들이 이 소중한 가문이 터를 나라 지키는 관아(월곶진/月串鎭)로 내준 통 큰 결단을 내렸다는 내용이 기념비에 적혀 있다고 한다. ’황형 장군‘의 묘소와 사당도 예서 승용차로 3분 거리에 있다니 이 일대가 그 문중의 터전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장무공 황형 택지(莊武公 黃衡 宅地)라 적혀 있는 비석을 가까이서 보고 바로 위에 있는 ’월곶돈대‘로 걸음을 옮긴다. 성벽 사이에 난 암문 정도 크기의 문을 들어서 계단을 오르니 강변 쪽에 꽤 큰 규모의 정자가 있고 그 옆엔 큰 느티나무가 서 있다. ’燕尾亭‘이라 쓴 현판이 붙은 정자 뒤쪽은 돈대의 성벽이고 그 아래가 강화해협 북동쪽 상류. 그러니까 조강(祖江)의 물길이 둘로 갈라져 강화해협과 서해로 들어가는 가는 갈림길을 굽어보는 곳에 연미정이 서 있다고 보면 된다. 정자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의 겹처마로 10개의 돌기둥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건축한 집이다. 높은 기둥 외에 마루도 놓지 않아 신발 신은 채 회의, 연회 등의 용도로 쓰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건너편 김포 땅 문수산 경치도 좋고, 좁은 바닷길 건너 북한 땅, 황해도 개풍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큰사진)연미정 옆 부러진 나무의 흔적 (왼쪽 위부터 ㄴ자로)월곶진 '조해루', 황형 장군 기념비와 월곶돈대, 연미정 전경, 연미정의 지도상 위치, 북한땅을 바라보는 돈대 밖 초소

최초 건립연대는 미상이지만 영조 때 중건했고, ’정묘호란(1627)‘ 때 강화조약 체결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한다. 병자호란 9년 전인 정묘년에도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해서 약 20일 머물렀다. 당시에는 ’청나라‘ 건국 전이라, 그 전신인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기로 약조하고 간신히 한성부로 귀환했던 또 한번의 피난사가 있었던 것이다. 연미(燕尾)를 우리말로 풀면 ’제비 꼬리‘이니, 하나의 물길이 둘로 나뉘는 모양을 보고 제비 꼬리처럼 갈라진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뒤태가 두 갈래로 길게 내려온 서양 예복을 ’연미복(燕尾服)이라 하지 않는가. 교동도(喬桐島)로 가는 물길과 강화해협으로 내려가는 물길이 갈라지는 모양을 제비 꼬리에 비유한 것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파주 교하(交河)에서 합쳐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조강(祖江)이라 하는데, 그 ’조강‘이 이곳 연미정 바로 위에서 강화해협(江華海峽)으로 남하(南下)하는 물길과 북한땅 개풍군과 남한땅 교동도 사이로 흘러가는 물길, 두 갈래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는 곳에 ’연미정‘이 있는 것. 절경(絶景) 구경에 북한 땅까지 지척에서 바라보며, 이런저런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부근 바다는 조류가 하루 두 번 크게 바뀌고 강물과 바닷물이 충돌하는 곳이라, 평시에는 한강의 마포나루나 양화진까지 올라가기 어려웠다. 때문에 조운선, 상선 등은 이곳 ’월곶진(月串鎭)‘ 부근에서 대기했다가 밀물이 들어올 때 그 물살을 타고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하니 이곳은 수운(水運) 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정자로서의 연미정과 주위 풍광의 아름다움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 없지만, 연미정 바로 곁에 서 있는 노거수(老巨樹)의 사연도 이곳을 다녀간 이라면 몰라서는 안 될 한 편의 이야기다. 원래 연미정과 좌우에 선 두 그루 느티나무 노거수는 한데 어울려 빚어내는 고상함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왼편에 섰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말았으니, 2019년 9월, 한반도를 강타한 13호 태풍 ‘링링’이 정자의 왼편에 서 있던 한 그루를 부러뜨려버린 것이다. 쓰러진 자리에 한동안 그대로 두었던 고목은 국가무형문화재인 장인께 의뢰하여 전통 목가구인 ‘강화반닫이’ 두 점을 제작, ‘강화역사박물관’과 ‘강화소창체험관’에 전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둥치 옆에는 쓰러져 있는 모양 그대로 나무의 외곽선을 땅에 새겨 놓았다. 안내판에는 사진으로도 남겨놓고. 그런데 남아 있는 나무 둥치에서 여러 갈래 가는 줄기들이 나와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살아 있다고 해야 하나,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다고 해야 하나.


이제 돌아가는 길이다. 연미정 주차장에서 10분 남짓이면 강화대교를 건널 수 있다. 서울과 강화를 잇는 도로는 늘 붐비고 밀린다. 16시 이전 출발을 권한다.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왼쪽 물길을 내려다 보면 연미정 근처 바다가 보이고, 눈을 들면 문수산이 높다. 문수산은 ‘병인양요’ 때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건너와서 육지까지 넘보다가,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정상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퇴각한 ‘문수산성 전투’의 현장이다. ‘강화도 여행기’의 다른 편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른쪽을 보면 굽이쳐 흐르는 바닷물 위에 ‘구 강화대교’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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