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 거쳐 외설악으로-1
'한계사’가 ‘백담사’로 바뀐 사연
- 백담사 가는 길 -
'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창건한 사찰이다. 자장스님은 원효(元曉), 의상(義湘) 스님보다 30년 정도 앞선 시기 즉, 신라의 3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당나라 유학승으로서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 주요 사찰 창건 등에 관여한 분이시다. 통도사, 월정사, 신흥사의 창건과 5대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과 암자를 두루 스님께서 주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강원도 설악산 깊은 계곡에 ‘한계사(寒溪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던 이 사찰은, 조선시대에 절 주위 계곡에 100개의 못(潭/담)이 있다는 의미의 백담사(百潭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화재가 많았던 절집의 주지 스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의 웅덩이를 세어보라 하여 다음날 세어보니 백 개나 돼 그렇게 이름을 바꾸었다는 전설이 그 바탕이다. ‘한계사’는 ‘한계리“, ’한계동‘ 같은 이 지역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개 이름 ‘한계령’과 지역적 유래가 같다. 선종(禪宗)의 산중 수행처로서, 불자(佛者)들과 내설악(內雪嶽) 등산객들에게나 알려졌던 이 사찰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더 알린 계기는 따로 있으니, 1988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에 머무를 때이다. 퇴임 직후 여론의 압박과 정치적 책임 문제로 ‘백담사’에 들어가 약 2년 정도 머무른 시기를 기억하실 줄 안다. ‘처사(處士)’ 차림으로 부인과 함께 수행하며 사는 듯한 모습이 연일 TV 뉴스 시간에 보도되었으니, 그때 국민들 모두 ‘백담사’를 귀에 못박힐 만큼 들었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결국 1996년 재판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책임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97년에 수감되었지만.
백담계곡을 일반 차량은 올라갈 수 없다. ‘백담탐방지원센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걷자면 약 7km 남짓. 차단기를 통과하면 왼편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계곡과 맑은 물, 하얀 바위들, 우렁찬 물소리에 감동하면서 걸음을 시작하지만, 어느 정도 가면 경사가 심해지고, 통행 차량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는 길과 보도가 아예 없어 위험한 구간을 2시간 이상 걸어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등산 복장을 갖추지 않았거나, 체력에 자신 없는 분들은 도보로 올라갈 수 없는 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편한 방법은 있다. 일반 관광객을 위해 몇 해 전부터 편도 2,500원의 셔틀버스가 운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승객이 차면 바로 출발하고 승객이 없으면 30분마다 정기 운행하는데 30분까지 기다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비수기에도 찾는 이들이 많은 사찰이라는 말씀이다. 버스 종점 바로 옆에 유료 주차장도 있으니 세워두고 갈아 타시면 된다. 요령이 생긴 분들은 근방 식당들의 주차장을 이용한다. 산나물이나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식당들도 꽤 많아 식사를 하면 주차 편의를 봐주신다. 점심 먹기에 이른 시간에 도착하면 주인장께 백담사 다녀와서 식사하겠노라 정중히 말씀드려도 된다. 식사를 하고 절에 가신다면 입 아프게 말 안 해도 세워놓고 갈 줄 다 아신다. 나는 셔틀버스 타는 곳에서 가깝고 주차장이 넓은 식당을 택해 ‘황태구이 정식’을 먹었다. 반찬도 많고 나물과 황태구이도 맛깔나지만, 황태국이 어찌 그리 뽀얗고 진한지...
백담사 바로 앞에는 아주 넓은 계곡이 완만하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올 땐, 여긴 계곡이 아니라 강(江)이다. 물이 마르면 다리 가운데쯤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가늘지만, 비가 내리면 계곡 양안(兩岸)까지 거의 물이 찬다. 修心橋(수심교). 마음을 닦고 건너라는 뜻인지, 건너면 마음이 절로 닦이는 것인지, 하여튼 건너보니 다리 끝에 금강문(金剛門)이 서 있다. 금강문을 들어서면서 어떤 분이 ‘일주문’이 없다,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걸 들었는데, 사실 일주문은 다리 건너기 전에 있다. 그분이 셔틀버스 정거장에서 바로 다리로 올라와서 일주문을 못 보신 것일 뿐. 하기야 버스에서 내리신 분들의 동선이 바로 수심교에 올라서도록 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다리를 건너며 좌우를 보면, 물가 자갈밭에 삐쭉삐쭉 솟은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돌멩이탑’들이 장관이다. 물가에 뒹구는 둥글 넓적한 돌멩이들을 올려 놓는 ‘탑쌓기’가 이곳의 유행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수천, 수만의 돌멩이탑이 백담사의 또 다른 상징이 된 것이다. 계곡에 물줄기가 가늘고 양안 자갈밭이 넓을 땐 자갈밭이 거의 돌멩이탑으로 덮이지만, 비 많이 와서 계곡물이 불어나면 모두 쓰러지고 떠내려간다. 비 그치면 금세 탑들은 또 세워지지만. 한편 돌들이 떠내려가면 계곡의 자연 생태적 구조에 영향을 준다는 경고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아래로 떠내려가다 보면 움푹한 어느 깊은 곳에 돌멩이들이 잠겨, 웅덩이들이 메워지면 생태계가 급격히 변할까 우려하는 것이다. ‘돌멩이탑 세상’도 보기 좋지만, 돌 주워 정성스레 탑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은 더 보기 좋다. 줍고 쌓는 정성을 볼 때, 돌멩이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소원이고, 누군가의 우정이고, 누군가의 사랑일 것이다. 문득 지난 여름, 계곡 물가에서 돌맹이탑 쌓기에 열중하던 아내와 딸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받는 둥 마는 둥, 쪼그리고 앉아 돌멩이를 고르고 올리던 모습. 지금 그 ‘공든 탑’의 돌들은 무너졌을지라도 그날 빌었던 소원만은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만해 한용운 -
양쪽에 눈을 부릅 뜬 ‘금강역사’의 검문을 받으며 금강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천왕문’인지 ‘불이문’인지 모르겠다 했는데 나중에 전각 배치도를 보니 불이문(不二門)이라 되어 있다. 불이문 밖에는 ‘百潭寺’라 써 있고, 안에 들어서면 ‘雪嶽山’이라 쓰인 현판이 또 붙어 있다. 불이문 내부의 양쪽 칸은 비어 있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범종각(梵鍾閣) 현판은 절집 안에서 밖을 보는 방향에 달려 있다. ‘百潭寺’, ‘雪嶽山’은 들어가면서 보는 현판, ‘梵鍾閣’은 안에서 밖을 보는 방향에 달린 현판이다. 그리고 만해 기념관과 만해 흉상. 그 옆 시비(詩碑)엔 ‘나롯배와 行人“이 새겨져 있다. ‘나는 나루ㅅ배/당신은 行人//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나는 당신을안ㅅ고 물을건너감니다/나는 당신을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여울이나 건너감니다’. 그리고 흉상의 기단 바닥이 뻗어나와 발등 같은 느낌을 주는 받침대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시, ’군말‘의 한 대목이 적혀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그리운 것은 다 님이란다. ‘군말’이란 원래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이다.
'만해(卍海)'는 호가 분명한데, 본명은 용운(龍雲)이 아니라고?
- 만해 한용운 -
‘만해’는 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위인이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시(詩),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올해-1926년이 시집 ‘님의 침묵’ 발간 백주년이란다. 독립운동가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한 진보적 승려이기도 한 그분의 출가와 수행의 도량인 백담사 탐방은 -부처님께는 죄송하지만- 늘 그의 자취를 먼저 느끼게 된다. 본명은 한유천(韓裕天)이요,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법명은 용운(龍雲). 혹자는 '만해'가 호고 '용운'이 본명인 줄 아시지만, ‘용운’도 출가 이후 얻은 법명이다. 1879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 본명 ‘한유천’으로 이런저런 세월을 살다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지만, 바로 출가하지는 않고 처사 노릇만 하다 다시 속세로 나온다. 이후 2~3년 간 방방곡곡은 물론 시베리아 만주까지 떠돌다가 다시 백담사로 들어가 20대 중반인 1905년에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 오세암은 백담사의 ‘산내 암자(山內 庵子)이니 한 집이나 다름 없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수행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불교계 대표로 3.1 만세운동의 33인 대표로 참여하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저항하는 한편 300여 편에 달하는 시조와 한시를 남겼으며, 몇 편의 소설도 남겼다.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조선불교유신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독립을 목전에 둔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남의 허물은 다 보이는데/내 허물은 보이지 않네'
- 조오현스님 -
백담사의 전설, 또 한 분의 스님 얘기도 곁들이려 한다. 2019년 입적했으니, 전설 치곤 오래 안 된 인물이다.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의 주지(住持)로, 회주(會主)로 수십 년을 이끈 스님이니, 설악산은 물론 강원도를 대표하는 승려로 꼽힌다. 화재로 온 국민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양양 ’낙산사‘의 성공적인 복원에도 큰 영향을 미친 분으로 불교식으로 소개하자면 '설악당(雪嶽堂) 무산(霧山) 오현(五鉉)스님'이시다. ’조오현‘이란 필명으로 시조 및 시, 선시를 두루 지은 시인으로, 문단의 어른이자 후원자였으며, 시집 ’아득한 성자‘로 2007년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곳 백담사에 그 분의 ’상(像)과 시비(詩碑)를 아우른 조형물이 있어 일단 소개하지만, 뒤에 들를 '만해 마을'에서 또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 새겨진 시는 ‘허물’이다. '남의 삶은 다 보이는데 내 삶은 보이지 않네/남의 죽음은 다 보이는데 내 죽음은 보이지 않네/그것 참 남의 허물은 다 보이는데/내 허물은 보이지 않네‘. ‘아득한 성자, ’비슬산 가는 길‘, ’파도‘ 등 좋은 시가 많지만, 이 시도 참 좋다. 여기 있는 ’무산 스님상‘과 아주 비슷한 것을 낙산사에서도 본 적이 있다. 거긴 ‘파도’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전신상이 여기 것과 똑 같은지 확신이 없다. 그 얘기는 뒤에 낙산사 기행에서 다뤄야 할 것 같다. 이 절의 큰어른이 시인이어서 그런지 백담사 경내에는 유난히 시비가 많다. 매월당 김시습, 허응당 보우스님 같은 불제자의 시야 있을만 하지만, 김구용, 오세영 같은 현대 시인들의 시비들이 눈길을 끈다.
들어갈 때 걸었던 ‘修心橋’ 가 놓이기 이전에 드나들던 다리 겸 보(洑를)를 통해 백담사를 나온다. 이 다리의 이름은 ‘수보교(修菩橋)’이다. 아마 ‘菩(보)’는 ‘보리(菩提, 깨달음)’나 ‘보리심(菩提心)’을 의미하지 싶다. 들어갈 땐 마음을 닦고, 나올 땐 보리심을 닦으라는 말씀인가. ‘수보교’는 ‘수심교’에 비해 낮아 물과 가깝고 난간이 없어서 비가 올 때는 발목 넘어까지 물이 잠기는 재미에 왔다갔다 한 적도 있다. 쭈그리고 앉아 수구(水口)로 들어가는 물과 빠져나가는 물살을 보다가, 물안개 낀 깊은 산중을 올려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신선 놀음의 다리이다. 그리고 내려서면 바로 자갈밭과 ‘돌멩이탑’들이니 속세와 다른 놀잇감이 즐비하다.
‘내설악 탐방’이라 하려면 대청봉은 몰라도 봉정암까지는 다녀와야 붙일만한 타이틀이지만 아무래도 거기까진 등산의 영역이다. 등산 아닌 여행길. 백담사에서 3.7km 떨어진 '영시암'이나 조금만 더 걸어 '수렴동'까지만 왕복하는 트레킹 코스를 목표로 출발한다. 비교적 평탄하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두세 곳 정도 울퉁불퉁한 바위를 넘으니 등산화를 신는 것이 편안하며, 왕복 2시간 30분 정도 잡고 천천히 걷다 쉬다 하면 딱 좋은 트레킹 코스이다. 올라가는길의 오른쪽으로 계곡이 쉬임 없이 흘러내린다. 백담사 앞처럼 넓고 평탄한 물길이지만 간간이 물굽이가 내려치는 곳이 있어 물소리가 시원하고 엉덩이 붙이고 발을 담글만한 바위도 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에 이르는 구간에는 지형 설명, 동식물 안내, 그리고 문학비를 포함해 열 댓 개 쯤 혹은 그 이상의 크고 작은 안내판과 석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생태 안내판을 제외하고, 백담구곡을 읊는 시문(詩文) 관련 해설판이 열 개 가까이 세워져 이곳을 노닌 시인, 묵객의 자취가 느껴진다. 그중 절반 이상이 '삼연 김창흡'의 '백담 구곡' 관련 시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1곡부터 9곡까지의 골짜기 이름도 ’삼연(三淵)‘이 붙인 것으로 짐작하는 이가 많다. 그래서 백담사에서 영시암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삼연(三淵)의 길’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아홉 골짜기-구곡(九曲)-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조선 성리학의 큰 스승인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면서 아홉 굽이 절경을 읊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은 것을 본딴 것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고산구곡(高山九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화양구곡(華陽九曲)’, 모두 '무이구곡'의 정신 세계를 성리학자가 도달해야 할 ‘수양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상정(想定)한 바에 다름 아니다. ‘삼연 김창흡’도 ‘백담 구곡’ 또는 ‘내설악 구곡’을 이상향으로 설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문집인 《삼연집(三淵集)》에는 내설악의 굽이굽이를 묘사한 시문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3년, 영시암에서 6년을 머물렀으니, 계곡 따라 오르내리면서 명명한 것이 분명한 6곡 ‘영시암(永矢庵)’과 7곡 ‘수렴동(水簾洞)’은 물론 나머지 일곱 풍경의 이름도 거의 그가 지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 명문가인 ‘장동 김씨(안동김씨 장동파)’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아버지가 김수항(金壽恒)이며, 장형(長兄)이 김창집(金昌集)이다. 김수항과 김창집은 부자(父子) 영의정이자, 각각 숙종과 경종 때 임금과 맞서다 사사(賜死)된 당대 최고의 정치가들이다. 김수항(金壽恒)은 노론의 영수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그의 여섯 아들이 모두 학문과 문장,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6창(昌)'이라 불리는 가문의 전성기를 일으킨 인물이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 경종)을 원자로 정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진도로 유배된 후 사사(賜死)된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6창 중 셋째인 김창흡은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금강산을 비롯, 전국 산천을 떠돌면서 관념 속이 아닌 실재하는 조선의 산천에 애정을 담은 문학적 성과를 축적하여 남긴 사람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부친과 가문이 복권되었음에도 여전히 야인으로 떠돌며, 마침내 설악산에 들어가 ‘백담 구곡’을 오르내리며 시를 짓고, ‘영시암(永矢庵)’을 창건한다. ‘백담 구곡의 아홉 이름을 짓고 계곡마다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으니, 영시암 가는 계속 구비마다 그가 읊은 시문 해설을 세웠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안동김씨 장동파(장동 김씨)의 세거지였던 장동(壯洞)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겸재 정선'이 이 집안의 후광을 업은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다. 정선은 14세에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살았으나 그 가문의 배려로 함께 수학(修學)하면서 일생을 통해 이 집안 형제들과 교류한다. ’6창‘ 중 둘째이며, 학문적으로는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 받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정선의 재능과 겸손한 성품을 아껴, '겸재(謙齋)'라는 호를 지어주고 학문을 전수했다고 하며, 금강산과 설악산, 온 나라 산천을 함께 유람하며 자신은 ’진경(眞景)‘의 시를 짓고, 겸재에게는 그것을 그리게 했던 스승은 바로 셋째 김창흡이었다. 정선을 세상에 알린 ’신묘년 풍악도첩‘도 함께 간 금강산 유람 결과 탄생한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정선의 작품첩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배경이 바로 그들 형제와 겸재가 이웃하여 살던 동네인 ‘장동(壯洞)’이라는 점을 연상하면 연결고리가 하나 더 생긴다. 요즘 핫플레이스가 된 '옥인동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를 그린 겸재의 그림 '수성동(水聲洞)'도 '팔경첩'의 한 폭이고. ‘장동’은 오늘날의 효자동, 청운동, 옥인동 부근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겸재의 집터로 짐작되는 현재 ‘경복고등학교’ 안에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집터’라 새겨놓은 표석이 있으니, 그곳이 곧 김창흡 형제들의 터전이기도 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청와대 옆 무궁화 동산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가 새겨진 시비는 '김상헌 집터'에 세워진 것인데, '청음 김상헌'이 바로 김수항의 조부요, 6창의 증조부, 다시 말하면 안동 김씨 장동파의 터전이 그곳이라는 이야기다. 한편 다시 한번 닥친 '가문의 위기'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큰형 김창집(金昌集)이 사사되고, 조카들이 몰살되는 거대한 비극을 마주하고 한 달 남짓 지나 증조부인 김상헌(金尙憲)이 양주에 세운 석실(石室)에서 김창흡은 최후를 맞는다. 지금도 옛 석실마을(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일대에는 증조부 김상헌, 부친 김수항, 그리고 맏형 김창집과 삼연 김창흡의 묘소가 모여 있다.
생소해 할 분이 많을 수도 있는 인물 ‘삼연 김창흡’에 대해 너무 길게 썼기에, 이 글이 영시암 기행이 아니라 '김창흡 일대기'로 읽힐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인제(麟蹄)나 속초(束草) 다시 말하면, ‘설악권’에서는 조선 시대 당시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던 설악산을, 수준 높은 시문을 통해 조선 천하에 알린 인문학자로 단연 김창흡을 꼽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사후 그의 형제와 제자들이 정리한 문집 ‘삼연집(三淵集)’은 수십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일생동안 지은 시 4,500여 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설악산과 관련된 시문만 대략 300편이 넘는다는 사실. 설악산 유람과 은거(隱居)의 기록인 ‘설악일기(雪嶽日記)’는 단순히 잡기(雜記) 수준이 아닌 날짜별로 지형, 식생, 기후까지 기록한 ‘인문 지리 보고서’로 평가 받는다는 사실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2016년 가을, 울산바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속초시 노학동’에 ‘삼연 김창흡선생 추념비(三淵 金昌翕先生 追念碑)’를 세워 속초시에서도 설악산을 조선 천하에 알린 ‘인문학자 김창흡’을 기리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시기 바란다.
영시암 가는 길. 이것저것 해찰하고, 시문 해설을 읽으며 1시간 남짓 걸어 올라가니 영시암에 도달했다. 김창흡이 직접 지은 암자이자 은둔처였던 ‘영시암(永矢庵)’의 '영시'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표현으로, 화살을 꺾어 부러뜨리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의지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한번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다시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이름 아니겠나”는 나의 예상은 엉터리로 판명나고 말았다. 영시암에는 등산객과 뜨내기 길손들을 위한 배려의 흔적이 여기저기 많다. 앉을 자리도 많이 설치했지만, 비 맞지 않게 지붕 얹은 공간에 뜨거운 물이 늘 끓고 있는 대용량 전기 포트, 그 곁에 놓인 ‘우리 차 티백(Tea bag)’. 심지어 화장실을 묻는 나에게 다실(茶室)에 들러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시라는 권유를 하실 정도이다. 길손들이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컵라면을 드시는 쉼터이기도 하지만, 점심시간에 국수 공양을 하신다는 말씀도 들었다.
경내에 세워진 “‘동유기(東游記)’에 설명된 영시암의 모습“, 제하(題下)의 해설판을 읽어보니 맨 아래 ‘圃陰集, 김창즙(金昌緝, 1662~1713)’이라 쓰여 있다. 위에서 언급한 김수항의 아들 ‘6창(昌)’ 중 다섯째인 '김창즙'이 셋째 형 은거지에 놀러왔다가 밤에 달구경 절경에 감탄하는 내용이다. 그 형제들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유명한 인물들이니 '김창즙'의 문집도 현재까지 전한다. 포음(圃陰)은 그의 호이다. 김창흡은 창건 이후 6년간 머물다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사정으로 이곳을 떠나 가니, 암자는 폐허가 된다. 이후 몇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쳐 명맥을 이엇으나, 6.25때 아예 전각이 소실된 것을 1994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雪峯道允)’이 중창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수렴동 지나 봉정암(鳳頂庵)으로 오르는 길, 오세암으로 오르는 길.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을 떠올리는 분들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을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많이 읽히기도 했거니와 영화, 에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어린 시절 읽은 김동리의 단편 소설 ‘오세암’ 그리고 ‘TV 문학관’에서 제작한 동명(同名)의 드라마도 기억한다. 그런데 그 오세암을 가보지는 못했다. 봉정암은 초년 교사 시절 ‘스카우트' 대원들 인솔하여 설악산 넘을 때, 이 코스로 가본 적이 있지만. 그때 수렴동 지나쳐 올라가다 큰비를 만나 엄청나게 불어나던 계곡물을 피해 '백담산장'으로 간신히 후퇴했었다. 백담사 맞은편 슾에 상당히 큰 규모의 산장이 있던 시절인데, 거기서 다른 등산객듵과 섞여 자고 다음 날 다시 비선대로 넘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비가 또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불안하다. 수렴도 대피소까지 가는 것도 무리다. 무리하지 말자. 영시암에서 철수(撤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