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ructive pessimism (건설적 비관주의)에 대하여.
일단 이 시 부터 읽고 넘어가자.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중
왜 어릴적부터 우리는 공부를 하고 대학교를 가는가. 왜 우리는 직장에 취직을 하려 하는가. 왜 결혼을 하려 하는가. 이 모든 일상적인 삶은 ‘위험’ 에서 ‘안전’으로 흘러간다. 어릴적부터 학습되어 온 소위 '인재'가 되어서 모든 위험요소들을 안정적으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된다.
또한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는 ‘느낌’을 죽이고 ‘사실’을 부각 시킨다. ‘오는길에 봄 꽃이 너무 이뻐서 회사에 좀 늦었어요’ 라고 말하는 직원에게 뭐라고 이야기 할 것인가. 자본주의 앞에서 봄 꽃은 '사실'로 바꿔야 한다. '느낌'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일상생할에 트러블을 불러올 수도 있다. 감성 보다는 이성이 분명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자세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근본적으로 모든것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Status-quo에 저항 정신을 가지고 당연한것들에 왜 그래야만 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본인을 위험으로 던져서 새로운 질문들에 답을 하려고 한다. 그 누구도 느끼지 않는 것들을 느껴야 하고, 당연한 것들에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고 본인의 답을 찾아야 한다.
피카소는 12살때 이미 라파엘로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었다고 단언한다. 이미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는 왜 자꾸 쪼개진 알아보기 힘든 그림들을 그린것일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눈으로만 보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이처럼 예술가들은 삶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편안한것들에 저항하고, 불안감을 온 몸으로 끌어않고서는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서는 본인의 존재를 실력으로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최대한, 물리적으로 가능한, 디테일을 파고 들려고 노력한다. 아주 조그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실수 조차도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을 ‘아, 나는 별로야’ 라며 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완벽에 다다르기 전까지 예술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이야기 한다.
‘I am not good enough’
너무 부정적이게 들릴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의 부족함의 인지는 창의적으로 재 해석 된다. 완벽에 다다르지 못한 작품들을 아티스트들을 끌어안고 살지 못한다. 버리고, 수정하고, 반복하고, 또 밤 새고, 이런 과정의 집착적으로 반복된다. 작업을 마치고 결과를 보는것은 그들에게는 불만족이 연속이다.이런 디테일을 수정하기 위해서 돈을 쓰고, 시간을 쓴다. 소설가는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서 몇날 몇일을 고민하고, 어느 기타 연주자는 음 하나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 또 고민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몇개의 실패작을, 몇 달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연극을 하는 사람은 표정 하나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낸다.
이런 디테일을 볼줄 아는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칭찬을 꺼려 한다. 내가 존경하는 가수 중 한명인 이소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요즘 방영중인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이다.
단출한 구성으로 불러본 ‘바람이 분다’가 끝나자, 멤버들은 모두 이소라의 노래에 한마디씩 얹는다. “아니, 기타 반주하는데 이렇게 가슴이 설레나?” “아, 이거 진짜 너무 대박이다.” “노래 부르기는 되게 힘들 것 같은데 듣기에는 되게 좋다.” 이소라는 당황해 웃으면서 말한다. “야, 이게 뭐야. 나는 이런 게, 내가 이래서 안 나오는 거야. 에이, 이거는 노래가 아니지. 안 돼.”
https://www.youtube.com/watch?v=fml516UPkVM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낀다.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perfect’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남은 칭찬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작업에 비관적인 자신의 모습을. 일단 이렇게나마 이름을 붙여보자.
Constructive pessimism (건설적 비관주의)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까. 그냥 현실에 만족하고, 자신의 실력에 감탄하면서 살면 안될까. 그러나 예술가들은 본인이 만족하는 순간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아마 이전에 이야기 했던 ‘perfect’의 기준은 아마 생이 끝날때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엔 모두 결과가 아닌 여정인거다.
본인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습관은 결국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삶이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발견할꺼다. 보이지도 않는 그 조그만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결국 그들을 위대한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할수도 있겠다. ‘편하게 살아요’ 그 질문은 예술가에게는 그림자가 되라는 말이랑 비슷하다. 본인의 작업을 본인의 정체성과 어느정도 연결된 상태에서, 작업을 대충 하라는 소리는 ‘넌 대충적인 사람이야’ 라는 말과 같이 때문에, 조언이 아닌 모독이 될수도 있다.
이런 저항 정신, 본인 스스로 의심을 하는 습관,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그만두고 포기하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예술가들은 무엇인가에 실마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의 부족함을 뾰족함처럼 느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노력하고 더욱 잘 하려고 할테고, 그런 사람들은 결국 본인의 매력을, 그리고 본인의 정체성을, 그리고 본인이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찾는 사람이 될테니 말이다.
이 글을 김수영 시인의 <시여, 침을 뱉어라> 라는 구절과 함께 마무리 한다. 김수영은 4월 이 글을 발표하고, 그해 6월에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걳이다.
사실은 나는 20여년의 시작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직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 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게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게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