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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학도사용쌤 Oct 21. 2022

이것은 변수인가 상수인가

변화를 위한 한 걸음


안녕하세요 파이드로스 원장입니다.


스무 살, 누구에게나 대학교 1학년은 가장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갓 들어간 대학교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이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2학기는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야 했습니다. 표면상의 경제적인 이유 이면에는 억눌린 고등학교 시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던 대학 생활에서 겪은 혼란감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1995년 9월 1일, 여름방학을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대학으로 돌아간 2학기가 막 개강한 날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산에서 천안, 온양, 청주, 대전을 거쳐 전라도를 돌고 해남 땅끝에 이르는 데 7일이 걸렸습니다. 여행 중에 전북 부안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꼭 제 눈으로 보고 싶은 문화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며 감동받은 내소사의 건축물입니다. 크기와 모양이 재 각각인 돌덩이를 가공 없이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해서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습니다. 우리 조상의 장인 정신이 담긴 유적입니다. 누군가는 이 돌멩이는 모양이 이상해서 쓸모없으니 버려야 한다고 할법한데 그 나름의 모양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장인이 보였습니다. 우리 인생이 딱 맞는 돌멩이를 찾아 헤매고 시간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듯합니다.




우리 조상의 얼은 흔한 담벼락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건축 자재가 무엇인가요? 별나게 생긴 돌멩이들도 훌륭한 건축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보는 관점에 각성을 촉구합니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관점입니다.









수학은 자연의 원리를 알아내고자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나뭇가지가 자라는 양상을 관찰하며 발견한 숫자는 황금비율(1:1.618)입니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숨겨진 코드입니다. 피보나치수열이라고 불리는 이 숫자는 전전항과 직전항의 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계속 증가하는 수열입니다. 이것은 자연현상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학 문제의 발전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류에 21이란 숫자를 문제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개의 유형을 보여주는 유형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수학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흔한 착각은 여기에 있습니다. 21개의 유형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그대로만 암기식으로 익히는 공부를 합니다. 21개의 유형은 곧 34개로 확장되어 시험 문제에 등장합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의 한 문장이 다빈치를 사로잡았습니다.







"사원에서는 서로 다른 부분들이 전체와 어울리는 대칭적인 관계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인체의 중심점은 배꼽이다. 사람이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서 두 손과 두 발을 뻗고, 배꼽 위에다 컴퍼스를 놓고 원을 그리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그 원의 둘레를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가 원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정사각형 모양도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발바닥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측정을 하고, 두 팔을 밖으로 벌렸을 때의 길이도 측정을 하면, 두 팔을 벌렸을 때의 길이와 신장이 정확히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때 완벽한 정사각형이 된다."







로마시대에서 다빈치의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비트루비우스의 문장을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팔을 벌렸을 때 길이가 원에 맞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비트루비우스의 문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받아들일 무렵 다빈치가 그 비밀을 벗겨냅니다. 팔을 약간 들어 올려서 원과 정사각형과 팔의 길이가 맞는 접점을 찾은 그림을 보여줍니다. 살짝 들어 올렸을 뿐입니다.






최근 10년 동안의 수능 킬러문제를 살펴보면 큰 전략이 눈에 들어옵니다. 학생이 상수(constant)로 간주한 문자가 자세히 살펴보니 변수(random walk)라는 착각을 노린 문제입니다. '아차! k가 상수가 아니라 변수였구나!' 시험 후 채점하며 씁쓸하게 깨우치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배불뚝이 아저씨는 어떤가요? 저 뱃살은 상수(constant)인가요? 변수인가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처음 본 인상에 지나치게 인식해서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처음 본 학생이 바른 자세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재는 모범생이구나' 간주하고, 또 어떤 학생은 장난치고 까불기만 하면 '재는 공부 할 의욕이 없구나' 쉽게 결정하고 그 결정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학생을 상수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물꼬를 틀어주면 공부와 반대 방향을 쏟던 에너지를 공부에 쏟을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학 문제를 풀어주는 것보다 열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학생은 상수가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는 교육의 질적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변화를 이끄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우선, 변화로 가는 길은 즐거움과 설렘이 묻어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지루함과 고통으로 채워진 미래를 원하지 않습니다. 학습계획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현실에서만 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상상의 세계를 이끌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누군가의 상상에서 출발한 발명입니다. 제품화되어 현실이 되기 이전에는 스티브 잡스의 즐거움과 설렘이 담겨 있는 상상이었습니다.


상상을 늘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은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인간의 뇌는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장 깊은 부분은 파충류의 뇌라 부르며 생존에 대한 판단을 담당합니다. 밀림에서 사자를 만나면 작동하는 뇌입니다. 두 번째 부위는 중뇌입니다. 포유류의 뇌라 부르며 감정을 담당합니다. 즐거움과 설렘은 여기에서 나오는 판단입니다. 세 번째 부위는 대뇌 피질부가 있는 전뇌로 가장 최근에 진화한 것입니다. 이성의 뇌라 부르며 학문적인 판단을 결정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논리학은 그 후 2천년 동안 이성의 뇌에 근거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이 논리학을 구축하고 감정의 영역은 배제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 플라톤 시절까지는 즐거움과 설렘 또는 분노와 열정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치로 탐구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상황의 설계가 필요합니다. 이번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 겁니다. 초원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이용해서 달립니다. 이미 사자의 발톱에 붙잡힌 얼룩말은 죽음을 기다리기만 할까요?

생에 의지는 기존의 먹이사슬 질서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사자에 붙잡힌 얼룩말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이 극도의 몰입을 유도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의 삶의 현장에는 사자가 쫓아오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과 얘기해 보니 시험 보는 순간은 몰입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학습 현장은 지나친 안전장치가 몰입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숙제를 할 때는 "모르면 학원 선생님에게 물어봐"

학원에서도 "모르는 건 선생님이 알려줄게"

좋은 수업은 학생과 활발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는 장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수업과 구분해서 학생이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task) 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 끝나면 모르는 건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이 당연한 논리이고 역할 분담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학원에서도 학생의 자립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혼자 힘으로 해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실제 사자는 없지만 비슷한 상황은 구현해서 몰입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쉽게 속아주고 긴장감에 빠져드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문제집은 반드시 세모로 오답이 케어 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학부모는 문제집에 틀린 문제를 세모가 되어 있지 않으면 학원에 전화합니다. "오답 관리가 안 되고 있어요!" 학원은 불필요한 학생과의 충돌, 학부모와의 충돌을 피하려면 부지런히 가르쳐줘야 합니다. 틀린 문제는 반드시 세모로 만들어 하원하게 한다는 마무리 정신이 요즘 학원 모토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철저한 오답관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학원 수업은 철저한 오답관리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 학생 혼자 힘으로 해낼 '미션'이 있어야 합니다. 답이 안 나오는 찜찜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 문제는 지금 답을 못 찾더라도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를 쫓아오는 사자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요? 죽음과 역경은 늘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조금 빨리 오는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만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을 공치면 내일이 있고 한 달을 공치면 다음 달이 있지만 이번 인생을 망치면 다음 인생이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기회는 다시 안 올 수도 있습니다.





https://youtu.be/WXXS5-hleoQ







하정우가 주연한 국가대표라는 영화가 기억나서 올려봅니다. 주어진 조건을 상수가 아닌 변수로 보는 관점을 따뜻한 감동으로 전해주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주제곡이 가슴 찡하게 다가옵니다.

https://youtu.be/fLk-dYXs_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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