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책에게 주세요'

사람 사이 위로가 버거워진 이들에게,

by 길동희

헤어진 그날 밤, 나는 습관처럼 책장을 열었다.


낯선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고,

밤새 친구들을 붙잡고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위로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언제나 더 큰 허무함이 고여있을 뿐이다.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이번에도 책이었다.

활자 속에서 나를 만날 때, 나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할까?’


내가 한 번쯤 했었던 생각을 말하는

작가의 문장에 밑줄 긋다 보면,


얼굴도 모르는 그와 마주 앉아

밤새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나도 내 아픔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보고 싶다’는

뜨거운 욕구가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친 적도 있다.


나는 괜히 정도 많고 생각도 많다.

처음엔 조그만 눈송이 같던 생각들이 어느새 단단한

잔눈깨비로 뭉쳐져 내 머리를 사정없이 때려댄다.

피할 길 없는 자책과 사색의 계절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별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유난히 긴 그 해 겨울처럼, 더 시리고 추웠다.

그 추위는 피부를 찌르다 못해 아려왔다.


도무지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직 나만이 갇혀버린 길고 긴 겨울.


매 연애에 진심을 다했고 내 최선을 바쳤기에,

마침표가 찍힌 직후엔 잔눈깨비 때문인 건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겨버렸다.


그저 그때마다 책장을 넘기며 눈물 몇 방울 떨구고,

삐뚤한 밑줄을 그으며, “인생은 결국 혼자구나”라는

시린 진리를 또다시 새긴다.

때론 나만의 사색에 잠기며 다신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 비장한 다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다 보니,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한 권씩 사 모은 책들이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내 공허를 먹고 자란 그 문장들이

비어있던 마음의 틈을 촘촘히 메워줄 즈음,

계절이 바뀌듯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작의 결말을 이미 알면서도

외면하는 독자처럼 새로운 책을 핀다.


'이번엔 다를 거야'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책장을 넘긴다.

나의 20대는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도돌이표였다.


한때는 이 반복되는 도돌이표가 무서워 도망치듯

누군가와 '결혼'이라는 결말을 꿈꿨다.


어느 외국 배우가 말하더라.

“결혼은 필요할 때 하는 게 아니라, 원할 때 하는 것”

이라고. 결국 그 말이 언제나 옳았다.


누군가에게 구원받기 위해 하는 선택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로의 농도는 옅어진다.


20대 초반, 친구가 이별했을 때 나는 기꺼이 나의 며칠을 내주었다. 함께 울어주고, 맛있는 것을 먹이고, 같이 욕을 해주며 그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했다.


그러나 20대 후반이 된 지금.

나의 이별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돌아온 것은 잠깐의 위로,

그리고 “상사 때문에 힘들다”는

친구의 고단한 일상이 결론이었다.


서운함보다는 먼저 깨달음이 왔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에 치여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귀 기울일 여유를 잃어간다.

가족도, 가장 친한 친구도 내 감정의

온전한 종착지가 되어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사람에게 기대어 상처받고 있을 그대들에게,

나처럼 밤잠 설쳐가며 사색의 늪을 허우적거릴

그대들에게.


사람에게 미처 기대지 못한 시린 그 마음,

"이별은 책에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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