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입시 잔혹사와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다시 그 불편한 대사를 꺼내본다.
"졸업하면 평생 엮일 일 없는 인종들이니까."
애니메이션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에서 이 대사가 나올 때, 주인공들의 반응은 흥미롭다.
그들은 "말이 너무 심하잖아!"라고 멱살을 잡거나, "우리가 왜 다른 인종이야?"라고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침묵하거나, 개인적인 호의로 그 틈을 메우려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학원물의 특징이자, 일본 사회의 기묘한 풍경이다.
차별은 존재하되, 분노는 부재한다.
'노오력'을 비웃는 시대, 사토리(깨달음) 세대
한국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거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뜨겁게 분노할 때, 일본 청년들은 '사토리(悟り) 세대'가 되었다.
'사토리'란 득도, 즉 깨달음을 뜻한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계급의 사다리를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을 거세했다. 승진에 관심 없고, 명품을 사지 않으며, 연애와 결혼조차 귀찮아한다.
이 체념의 뿌리는 깊다.
1990년대 초반, 거품 경제(버블)가 붕괴되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긴 터널에 진입했다. 지금의 일본 청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황이었고, 자라면서 본 것은 밤낮없이 일하다 과로사하거나 구조조정 당하는 부모 세대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동화책 속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종의 사기였다.
그러니 편차치 40 학생이 편차치 70 대학을 목표로 잠을 줄이는 건, 일본 사회에서 '열정'이 아니라 '비효율'일 뿐이다.
오야가챠(부모 뽑기)와 운명론
최근 일본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단어 중 '오야가챠(親ガチャ)'라는 말이 있다.
부모(오야)와 캡슐 뽑기 장난감(가챠)을 합친 말로, 한국의 '수저 계급론'과 비슷하다. "내 인생은 부모 뽑기에서 이미 결정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뉘앙스가 묘하게 다르다.
한국의 수저론에는 "흙수저라 억울하다, 판을 뒤집자!"라는 분노와 오기가 서려 있다면, 일본의 오야가챠에는 "꽝이 나왔네, 어쩔 수 없지(仕方がない·시카타가나이)"라는 수용과 체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난이나 낮은 학력을 사회 구조 탓으로 돌려 싸우기보다, 그저 '운이 나빴음'으로 받아들인다.
대신 그 안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메이와쿠),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찾는 것으로 생존 전략을 짰다. 그렇게 일본 사회는 거대한 '순응의 바다'가 되었다.
평온함인가, 박제된 절망인가
덕분에 일본 사회는 겉보기에 매우 평온하다.
편차치 높은 명문대생은 그들끼리 결혼해 기득권을 세습하고, 편차치 낮은 프리터(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에서 소박하게 산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니 갈등도 없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 각자의 층위에서 잔잔하게 흐른다.
하지만 나는 이 고요함이 한국의 시끄러운 아우성보다 더 무섭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사회는 죽어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벽을 부수는 대신 벽에 기대어 잠든 아이들. 이것이 '개천에서 용이 멸종한' 일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벽을 부수겠다고 달려드는 곳은 희망이 있을까?
시선을 돌려, 자본주의의 정점인 미국으로 가보자. 그곳에는 돈으로 벽을 사버리는 아주 세련된 '용'들이 살고 있다.
[다음 글] 4. 아메리칸 드림의 민낯: 미국이 한국보다 용 나기 힘든 이유
"이건 다 내 실력이야." 부모의 재력을 '능력'이라 부르는 나라. 캘리포니아의 두 고등학교가 보여주는 잔인한 자본주의 성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