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용'들을 위한 변명 - 2

한·미·일 입시 잔혹사와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by Gildong

2. '편차치'라는 계급장: 학교 이름이 곧 DNA가 되는 사회


당신의 가치는 숫자 몇입니까?


다시 애니메이션 <향기로운 꽃은 늠름하게 핀다>의 세계로, 그 아름답지만 잔인한 담벼락 앞으로 돌아가 보자.


여주인공 와구리 카오루코가 다니는 '키쿄 학원'과 남주인공 츠무기 린타로가 다니는 '치도리 고교'는 물리적으로는 바로 옆집이다. 창문을 열면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는 좁혀질 수 없는 평행선이다.


키쿄의 학생들은 치도리 학생들을 보며 노골적으로 코를 막거나 길을 돌아간다. "무서워, 가까이 가지 말자", "역시 치도리 꼴통들이야." 그들에게 치도리 학생은 같은 10대가 아니라, 피해야 할 잠재적 범죄자 집단일 뿐이다. 반면 치도리 학생들은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화를 내기보다 고개를 숙인다.


도대체 무엇이 이웃한 소년 소녀들을 이토록 완벽하게 갈라놓았을까? 그 보이지 않는 철조망의 이름은 바로 '편차치(偏差値·Hensachi)'다.


50점짜리 인간, 70점짜리 인간


한국 독자들에게 '편차치'는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 있다. 한국 수능의 표준점수와 비슷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편차치는 입시철에만 쓰이는 점수가 아니다. 그것은 10대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니며 내 가치를 규정하는 '낙인'에 가깝다.


편차치는 평균을 50으로 잡고, 내가 전체 집단에서 얼마나 우월한지, 혹은 열등한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편차치 70이면 상위 2%의 선택받은 엘리트, 편차치 30이면 하위권. 일본 사회에서는 흔히 'F랭크'라 부르며 비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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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차치 50: 딱 중간. 평범한 사람.

편차치 70 이상: 상위 2%의 엘리트. (도쿄대, 교토대 진학 가능권)

편차치 30 이하: 하위권. (일본 사회에서는 흔히 'F랭크'라 비하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속 설정을 편차치로 환산해 보면 잔인한 현실이 드러난다. 명문 여고 '키쿄'는 아마도 편차치 70~72 정도의 초엘리트 학교일 것이다. 반면 꼴통 남학교로 묘사되는 '치도리'는 편차치 35~40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이름만 대면 상대방의 이마에 숫자가 자동 계산되어 뜬다. "아, 너는 70점짜리 인간이구나." "너는 40점짜리 인간이구나."


이 숫자는 잔인할 정도로 '과학적'이다. 부모의 재력이나 인맥 같은 모호한 배경이 아니라, 오로지 시험 점수라는 통계적 수치로 산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계급장에 토를 달지 못한다. 내 머리가, 내 노력이 숫자로 증명되었으니까.


어른들이 가르친 혐오: "그들과는 어울리지 마라"


이 차별이 더 무서운 이유는, 이것을 공고히 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어른들'과 '학교'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4화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키쿄 학원의 한 교사가 여주인공의 친구에게 조용히 경고한다.


"치도리 학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


이것은 교육자의 조언이 아니라 '오염'을 막으려는 방역 지침에 가깝다. 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인품이나 성격을 보지 않는다. 과거 10년 전 발생했다는 불미스러운 사건 하나를 핑계 삼아 집단 전체를 싸잡아 매도하고, 제자들에게 차별을 '상식'으로 주입한다. 시스템이 아이들에게 혐오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린타로 역시 이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는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어릴 적부터 "양아치 같다"는 오해를 받아왔고, 치도리 고교에 진학하면서 그 낙인은 확신이 되었다. 그는 키쿄 학생들의 멸시를 받을 때 분노하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다. 편차치라는 숫자가 이미 자신의 이마에 '하급 시민'이라는 바코드를 찍어버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교 이름이 DNA가 될 때


한국은 고교 평준화 정책 덕분에, 적어도 고등학교 간판만으로 사람을 완전히 재단하지는 않는다. 진짜 승부는 대학 입시(수능) 한 방에서 결정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입시를 치른다. 그리고 이때 결정된 고등학교의 서열은 대학, 취업, 결혼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편차치 높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건, 15살 나이에 이미 '성실하고 우수한 DNA'를 검증받았다는 뜻이다. 반대로 낮은 편차치의 학교에 갔다는 건, 인생 초반부 레이스에서 이미 탈락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스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예측 가능성'이다. 내 편차치가 40이라면, 나는 40 정도의 대학을 가고, 40 정도의 회사에 들어가, 40 정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미래가 너무나 투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일본 청춘들은 무리하게 벽을 넘으려 하지 않는다. 한국 학생들처럼 "수능 대박나서 인생 역전하자!"라며 머리를 깎고 기숙학원에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편차치에 맞는 '분수'를 지키며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다.


누군가는 이것을 일본 사회의 '안정'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조용한 절망'이라 부르고 싶다.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에서 피어나는 평온함이란, 식물인간의 평온함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이 '조용한 절망'은 어떻게 일본 사회 전체를 '사토리(깨달음) 세대'로 만들었을까? 다음 화에서는 분노가 거세된 나라, 일본 청춘들의 슬픈 생존법을 들여다보겠다.


[다음 글] 3. "졸업하면 엮일 일 없는 인종" (체념의 기술)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욕망을 거세하고 '사토리(깨달음) 세대'가 된 일본 청년들. 그들의 조용한 절망은 과연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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