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용'들을 위한 변명 - 5

한·미·일 입시 잔혹사와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by Gildong

5. 하버드생의 착각: "나는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지 않는 엘리트들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동네, 팔로알토에서 자란 아이가 명문 '건 하이스쿨'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합격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부모님의 재산세나 팔로알토의 쾌적한 면학 분위기에 감사할까? 아니다.


그는 자신이 고등학교 4년 동안 도서관에서 밤새워 공부했던 시간과, 수많은 과외 활동을 소화하느라 흘린 땀방울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노력했고, 그래서 승리했다. 고로 나는 이 보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


이 논리는 너무나 완벽하고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 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 '공정하다는 착각'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귀족제보다 잔인한 능력주의


과거 귀족 사회(신분제)에서는 가난한 소작농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지언정, 자책하지는 않았다.


"내가 못난 게 아니야. 단지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이지." 그들에겐 시스템을 탓할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는 다르다.


이곳은 표면적으로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회는 있었어. 그런데 네가 노력을 안 한 거야. 네가 무능한 거야."


능력주의는 패배자에게 가난뿐만 아니라 '굴욕감'까지 안겨준다. 반대로 승리자에게는 '오만함(Hubris)'을 선물한다.


자신의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는 확신. 그래서 실패한 이들을 보며 연민을 느끼기보다 "게으른 사람들"이라며 경멸하게 된다.


일본의 청춘들이 편차치 앞에서 '체념'했다면, 미국의 엘리트들은 성공이라는 성취감에 취해 타인을 '삭제'해 버렸다.


재능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샌델 교수는 이 오만함을 부수기 위해 불편한 진실을 들이민다.


"당신의 재능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Luck)이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16세기 피렌체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가 아무리 화려한 드리블을 해도, 프레스코 화가들을 우대하던 그 시대에 그는 별 볼 일 없는 육체노동자였을 것이다.


그가 21세기 미국에 태어나, 농구라는 스포츠가 자본주의와 결합해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이 아닌 '시대적 행운'이다.


수능을 잘 보는 머리, 끈기 있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성격, 사교육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모. 이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중독된 엘리트들은 이 '행운'의 지분을 '노력'이라는 단어로 덧칠해 지워버린다.


인센티브가 도덕을 몰아낼 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회 전체를 '인센티브(돈) 만능주의'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공부 잘했으니 의사가 되어 연봉 수억 원을 받는 건 당연해." "공부 못했으니 청소부가 되어 최저시급을 받는 것도 당연해."


모든 가치를 '시장 가격(연봉)'으로만 환산하는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도덕적 가치나 공동체 의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미국의 노동자 계급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노력하지 않은 패배자" 취급하며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경제적 지원)보다 존중(Dignity)을 원했고, 그 분노가 투표소에서 폭발한 것이다.


자, 이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차례다.


한국의 교실과 직장은 어떤가? 우리는 일본의 '순응'보다 미국의 '능력주의'를 더 닮아있지 않은가?


"억울하면 출세해라." 이 말이 상식이 된 나라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 글] 6. 의사와 청소부: 무엇이 우리를 서로 경멸하게 만들었나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일상 속 혐오가 만든 비극. 의사도 청소부도 똑같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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