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입시 잔혹사와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잠시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떠올려 보자.
세상이 멈췄을 때, 우리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누구였나?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우리에게 생필품을 날러준 택배 기사, 병실을 닦고 소독한 청소 노동자, 마트 계산원, 그리고 간호사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필수 노동자(Essential Worker)'라 부르며 잠시나마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나자 박수 소리는 멈췄고, 현실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일을 하는 이들은 여전히 가장 적은 임금을 받고, 가장 낮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반면, 주식 시장에서 클릭 몇 번으로 수억 원을 움직이는 금융가나 컨설턴트들은 여전히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마이클 샌델은 묻는다.
"우리가 지불하는 연봉이, 정말 그 사람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하는가?"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능력주의 사회의 가장 잔인한 풍경은 학교 밖 거리에서 펼쳐진다.
부모가 아이 손을 잡고 가다가 힘겹게 폐지를 줍거나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속삭인다.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이 한마디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주입한다.
첫째, 육체노동은 '실패한 인생'의 상징이라는 것. 둘째, 네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천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가 의사가 되거나 판사가 되었을 때, 과연 청소부를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에게 청소부란 '노력하지 않은 자'의 말로일 뿐이다.
능력주의는 이처럼 노동을 '신성한 것'이 아니라 '공부 못한 벌(Penalty)'로 전락시켰다.
쓰레기를 줍는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사망하기 직전,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을 찾아가 이렇게 연설했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의사만큼 소중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회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청소부가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창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킹 목사의 말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오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 존속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지성도 훌륭하지만, 땡볕 아래서 벽돌을 쌓는 미장이의 기술이 없다면 건물은 올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머리 쓰는 일(Brain)'과 '손 쓰는 일(Hands)'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신분 장벽을 세웠다. 그리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의 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일"로 깎아내린다.
자신의 노동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인간은 자존감을 잃는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곧장 사회를 향한 분노로 바뀐다.
미국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가 트럼프를 소환했듯 말이다.
가장 뜨거운 지옥, 한국으로
자, 이제 이 긴 여행의 종착지인 한국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일본은 차라리 포기하고 순응했다. 미국은 돈이라는 명확한 기준이라도 있다.
그런데 한국은? 한국은 일본의 '학벌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결합한 끔찍한 혼종이다.
모든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이 '의사'로 통일되는 나라. 배달 기사가 월 500을 벌면 "공부도 안 한 주제에"라며 악플이 달리는 나라.
노동을 천시하면서도,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전 재산을 사교육에 쏟아붓는 모순의 나라.
다음 장부터 우리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이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왜 우리의 '사다리'가 부러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처참한 붕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다음 글] 7.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 '헬조선'은 엄살이 아니다
성장의 파티는 끝났고, 계산서만 남았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해진 세대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과 절망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