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의 몰락과 구조화된 가난에 대하여
중앙은행의 제1 책무는 '물가 안정'이다. 화폐 가치를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행(BOK)은 그 신성한 의무를 저버렸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부는 대신, 쓰러져가는 좀비 기업에게 산소 호흡기를 달아주려 그라운드를 뛰고 있다. 그들은 말로만 "긴축"을 외칠 뿐, 뒤로는 쉴 새 없이 돈을 찍어내는 '스텔스 양적 완화(Stealth QE)'를 자행 중이다.
수법은 교묘하다.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RP(환매조건부채권) 매입이라는 단기 자금 공급 수단을 악용한다. 본래 며칠짜리 단기 처방이어야 할 RP의 만기를 끊임없이 연장해 사실상 영구 대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1조 5천억 원 규모의 국고채 단순 매입까지 단행했다. 이는 시중은행의 신용 창출을 통해 수십 배로 불어나는 '고성능 폭탄(High-powered Money)'을 시장에 투하한 꼴이다. 이유는 단 하나,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의 폭발을 막기 위해서다.
금융권에는 '에버그린(Evergreening)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이미 죽어 썩어가는 나무(부실 대출)에 녹색 페인트를 칠해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행위다. 2022년 '둔촌주공 구하기'부터 시작된 한국은행의 돈 풀기는 거대한 에버그린 작전이었다. 망해야 할 시행사와 건설사를 돈으로 틀어막아 연명시킨 결과, 도려냈어야 할 환부는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자도 못 내는 좀비 시행사들이 한국은행이 뿌린 돈으로 숨만 쉬며 건전한 자본을 빨아먹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가장 심각한 징후는 '금리의 역설'이다. 경제학 교과서대로라면 돈을 풀면(공급 증가) 금리(돈의 가격)는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돈을 천문학적으로 뿌리는데도 시장 금리가 치솟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이 보내는 '불신(Distrust)'의 시그널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은행이 부실을 덮기 위해 돈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원화 가치가 희석되고 채권의 위험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들은 더 높은 이자(Risk Premium)를 요구하거나, 아예 한국 시장을 떠나버린다. 한국은행이 돈을 찍을수록 원화 가치는 떨어지고, 외국인은 떠나며, 금리는 오르는 '신뢰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한국은행은 당장의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대신, 미래를 팔아 현재의 부실을 덮는 길을 택했다. 이는 명백한 국민에 대한 배임이다. 좀비 기업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돈은 세금이든 인플레이션이든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간다. 댐에 금이 갔는데 물을 빼지 않고 시멘트만 덧바르는 행위, 그 대가는 댐이 터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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