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은 채로 다정한

COZY LOGS|Still Damp, Softly Kind

by Gildong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겼을 때였다.


이미 조금 식어버린 온도였다. 유리창에는 희미한 습기가 남아 있었고, 바깥의 빛은 시간대를 특정할 수 없을 만큼 흐릿했다. 사람들은 분명 주변에 있었지만, 말소리는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이미 지나간 뒤의 자리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한 박자 늦게 도착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공기 위를 얇게 긁고 지나간다. 누군가 문장을 끝냈지만, 더 이상 보낼 곳을 찾지 못한 채 멈춰 선 느낌. 잉크는 이미 말랐고, 남은 것은 눌러 쓴 자국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다음은 알람이다. 분명 울렸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는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깨워야 할 사람도, 나를 깨울 사람도 없는 아침은 그렇게 고요하게 남는다. 커피 머신이 짧게 숨을 토해낸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다가 금방 흩어진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그 김에 섞여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걷고 있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비슷한 속도로. 그 사이에서 혼자 다른 박자로 움직이는 발걸음 하나가 어긋난다. 멈춘 것도, 따라가는 것도 아닌 상태. 그 어중간한 리듬이 오래 남는다. 버스가 지나간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면 낮은 진동이 어깨로 올라온다. 익숙한 정류장을 지나치는 순간, 손잡이를 쥔 힘이 조금 더 단단해진다. 그냥 지나쳤다는 감각이 오래 남는다.


다시 조용해진다. 물 끓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다. 어제와 같은 컵, 같은 자리, 같은 각도의 빛. 하루가 시작된 건지, 어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비어버린다. 초침이 느려지거나, 소리가 잠깐 끊긴 것 같은 착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공기만 조금 어긋나 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가 떠오른다. 채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둔 상태. 비어 있는 채로 남겨진 공간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젖은 도로 위로 지나가는 차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린다. 우산을 펼칠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 조금 젖어 있는 공기. 그 애매한 습기가 오래 머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소리가 정리된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 스위치를 끄는 작은 클릭. 누군가 자리를 떠난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던 공기만 남는다.


감정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흩어지고, 지나간 자리의 온도만 오래 남는다. 끝내 정리되지 않은 장면들. 그 사이에 남겨진 빈칸. 이 소리들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스며든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둘 때, 기억은 비로소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