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초보운전 시절은 있잖아요
회사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메모를 끼적이는 사람이 있었다. 해고가 두렵지 않은 그녀는 이미 퇴사를 마음먹고 버킷리스트를 적어 내려 가는 중이었다.
“타투 배우기, 밴드 공연, 프리랜서, 워킹 홀리데이, 마지막으로 운전하기! “
“진짜 너다운 목표들이다. “
”응, 우선은 운전면허부터 딸 거야! “
겉으로는 당당한 척을 했지만 사실 겁 많은 내게 운전은 선뜻 도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중교통도 잘 되어있는데 운전을 꼭 해야 하나? 운전대는 내 손에 타인의 생명을 쥐는 거라던데 어깨가 무거워.‘.
이렇게까지 겁이 많으면 그냥 지내도 되지 않나 싶지만 내겐 무언가의 사명이 있었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운전하지?’
나보다 겁이 많은 엄마와 오빠 사이에서 막내 공주이고 싶던 나는 상대적으로 씩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아빠가 아니면 누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나라도 해야지. 차 끌고 다니는 공주가 조금 더 멋지잖아.
이미 대부분의 친구가 운전을 하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부분도 있다. 너도 나도 다 하고 다니는데 못할 게 뭐가 있어. 금방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고민하던 나는 퇴사 1년 뒤 운전면허장에 발을 디뎠다.
면허 따기는 생각보다 많이 수월했기에 한 줄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 어쩌다 보니 따기는 했는데 제가 진짜 도로에 나가도 되는 건가요? (연습 많이 하세요.)
말했다시피 우리 집에서 운전이 가능한 건 아빠밖에 없다. 이 말은 즉슨, 우리 집에는 아빠의 자가용과 업무용 차밖에 없다는 소리다.
기껏 면허를 땄더니 운전할 차가 없어 나의 면허증은 그대로 봉인되었다. 엄마랑 오빠와 다를 바 없이 나란히 장롱면허가 되다니!!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나는 돈이 없는 백수이고~당장 운전할 이유도 없고~
차가 생길 좋은 기회가 있었다. 오빠의 직장이 교통이 불편해서 부모님이 중고차를 뽑아주려 한 것이다.
'겁이 많은 오빠니깐 내가 출퇴근시켜주면서 타고 다녀야지!‘
하지만 이런 나의 야망은 오빠가 차를 사기도 전에 퇴사하며 사라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운전에 대한 열망은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운전 연습 열심히 하고 워홀 가야 하는데… 블로그 체험단도 다녀야 하는데… 차 끊길 걱정 없이 놀러 다녀야 하는데…!(이게 본심)‘
그러던 중,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면허를 따고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너 여기에서 일해볼래? 근데 교통이 불편해.”
“사장님께 밑밥도 다 깔아 둬서 생글생글 웃으며 면접만 보면 돼.”
친구가 알바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프리랜서 일에 집중하겠단 핑계로 알바를 관뒀는데 매우 좋은 조건에 나의 팔랑귀가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사장님이 우려한 부분이 있으니, 새벽 출근으로 자가용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모든 조건이 딱 맞았기에 기회를 놓치기 싫던 나는 중고차를 사기 위해 당장이라도 적금을 깰 심상이었다.
“마침 친구가 차 바꾼다던데 연락해 볼래? “
살다 보면 고속도로가 뚫린 것처럼 모든 일이 오차 없이 술술 풀릴 때가 있다. 내겐 지금이 딱 그때인 것 같았다. 고속도로 뚫어놨으니 얼른 중고차 사고 달려보라는 계시인가 봐!
“심지어 네가 좋아하는 차종에 네가 좋아하는 핑크색 랩핑이야.”
원래 이 정도로 딱딱 맞으면 사기가 아닌지 의심 한번 해봐야 한다. 모든 게 내 취향에 부합하는데 가격까지 싸? 게다가 마침 친구의 지인이야? 침수됐거나 사고 차량도 아닌데?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엔 이미 눈이 돌아가있었다. 바로 약속을 잡고 중고차 거래를 끝마쳤다.
재미있는 점은 중고차를 샀으나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른다. 면허를 딴 이후로 단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다.
아니, 딱 한번 도로를 나간 적이 있는데 바로 제주도에서 스쿠터를 탄 경험이다. 이때 신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리 감각 부족으로 사고를 쳐 수리비를 낸 기억이 있다.
결국 매매가 끝난 후 차를 끌고 갈 수 없던 나는 대리운전을 불렀다. 대리기사님은 술 한잔 마시지 않고 대리를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재미있어했다.
그렇게 나의 첫 연수는 대리기사님의 밟아야 한다!! 는 조언과 함께 끝이 났다.
나의 나이와 따끈따끈한 면허증은 어마무시한 보험금을 가져갔고, 이게 아까워서라도 운전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가 밝자마자 바로 방문연수에 연락을 돌렸다. 선생님! 저도 운전할 수 있겠죠?
면허학원차량과 우리 광식이(경차라고 무시받지 말고 강해지라고 험악한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너무나 달라서 기초적인 부분부터 배워야 했다.
1일 차에는 정말 간단한 각 버튼이 하는 일과 시동 켜기, 깜빡이 등을 배운 뒤 직진 도로를 1시간 내내 달렸다. 그냥 일자로 달리는 건데도 광식이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광식아, 네가 그렇게 흔들리면 내가 음주운전으로 오해받잖아. 강사님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가장 기본인 일자로 달리기가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을 다했지만 소심한 내면은 잔뜩 기가 죽어버렸다. 안되는데… 내가 운전 안 하면 우리 광식이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음주운전 취급을 받던 1일 차와 다르게 2일 차에는 바로 중심이 잡혔다.
‘아~뭐야~!! 나 소질 있나 봐!!’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좌우회전과 유턴까지 경험하니 기고만장해진 나는 꽤나 큰 실수를 해버렸다.
기어를 드라이브로 바꾸는 걸 깜빡한 채로 액셀을 밟아버렸고, 차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부아아아아앙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뿜었다. 힐끗 바라본 강사님의 다크서클이 처음보다 깊어져 있었다.
다행히 3시간이라는 장거리 운전을 한 3일 차와 주차 연습을 한 4일 차에는 추가적인 실수가 없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차라리 완전 초보운전일 때 이러한 경험을 해봐서 다행이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성격 상 혼자 기고만장해져서 스피드레이서가 됐을 것 같다. 하하!
지금은 도로연수가 끝나고 또다시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나름대로 운전에 재미가 붙어 한 달간 열심히도 운전을 하고 다녔다만, 아직도 내게 혼자서 운전은 불가능하다.
애착인형처럼 꼭 친구나 아빠를 데리고 다니는데, 나중에 혼자서 운전을 하고 다닐 때면 이때의 기억이 참 웃기고 귀여울 것 같아 기록을 남긴다.
영원히 운전을 못할 것 같던 내가 운전을 하게 된 것도 신기한데 초보운전 스티커를 떼어낼 때는 또 얼마나 신기할까.
퇴사 후, 하길 잘했다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현재까지는 압도적으로 운전을 꼽고 싶다.
“여러분, 운전은 꼭 하세요! 꼭! 삶이 달라져. 진짜. “
아, 그래서 친구가 소개해준 알바는 어떻게 됐냐고?
... 떨어졌다.
광식이를 만나기 2주 전이었다. 짜둔 계획이 다 틀어졌지만 광식이를 만나서 나는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