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3장 - 소리의 그림자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이반의 방은 여전히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러웠지만, 어제와는 달리 그 무질서조차 이 아이가 남긴 삶의 흔적처럼 느껴져 조금은 정이 갔다. 구석에 처박힌 낡은 메트로놈, 책상 밑에 구겨진 악보 뭉치들.
‘이반이는 매일 이 풍경을 보며 잠에서 깼겠구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여전히 작고 가벼웠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이제는 이 작은 몸이 짊어지고 있던 보이지 않는 무게가 내 어깨에도 조금씩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학교로 향하는 길, 자전거 바퀴가 보도블록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바람이 양옆으로 흩어졌다. 핸들을 잡은 작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날보다 더 많은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전신주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등굣길 아이들의 불규칙한 발소리….
아니, 사실은 어제와 똑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단지 내가 이반이라는 예민한 ‘수신기’를 장착하고 세계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소음이었던 것들이 이 아이의 귀를 통과하면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편의점 앞에 유석이 서 있었다.
“야, 장이반! 오늘은 웬일로 일찍 왔냐?”
“그냥… 좀 일찍 눈이 떠져서.”
“오, 설마 그 게임 때문? 어제 단톡방에서 애들 그거 6단계 공략법 난리 났더라.”
나는 무심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나도 오늘 학교 끝나고 제대로 한번 해보려고.”
유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야, 너 근데 요즘 되게 말투 부드러워졌다? 전에는 내가 게임 얘기만 꺼내도 ‘아빠가 알면 큰일 난다’느니 뭐라느니 되게 까칠하게 굴었잖아.”
나는 무슨 말로 받아칠까 고민하다가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유석이 자전거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덧붙였다.
“근데 난 지금이 더 좋아. 네가 그러니까 우리끼리 말 걸기도 훨씬 편하거든. 전에는 가끔 네 눈치 보였다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이반아, 너는 그동안 아빠의 원칙을 지키느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던 거구나.
음악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오선지를 그리며 말씀하셨다.
“자, 다들 기억나죠? 지난 시간에 연습했던 ‘노란 가을길’이에요. 다 같이 음을 한 번 짚어볼까요?”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낮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란 가을길, 조용한 발자국….’
그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책상 밑에서 발끝이 박자를 찍기 시작했다. 툭, 툭, 반 박자 쉬고, 다시 툭. 정확했다. 음악 이론을 배운 적 없는 내 이성은 당황했지만, 이반의 몸은 어디서 음을 끌어올리고 어디서 숨을 멈춰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내 팔꿈치를 툭 쳤다.
“야, 이반. 너 이거 멜로디 정확히 기억나?”
“응… 아마도.”
“한번 불러봐. 나 여기 음정이 자꾸 헷갈려서.”
나는 망설이다가 아주 작게, 교실의 소음 속에 섞일 만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란 가을길… 조용한 발자국….”
그냥 가볍게 흥얼거렸을 뿐인데,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의자까지 돌려 나를 바라봤다.
“와, 너 음정 진짜 정확하다. 기계로 찍은 것 같아.”
선생님은 뒤쪽의 작은 소란을 듣지 못한 듯했지만, 내 주변 몇몇 아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반아… 너는 이런 재능을 매일 어떻게 감춰온 거니. 아빠가 무서워서, 아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빛나는 감각을 죽이며 살았던 거야?’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교실 뒤편에 놓인 낡은 피아노 앞에 누군가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다가가 그 옆에 섰다.
“이 곡, 너도 알아?”
친구가 묻자 나는 홀린 듯 대답했다.
“응… 조금.”
“그럼 네가 한번 쳐볼래? 난 자꾸 손가락이 꼬여서.”
조심스럽게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C, G, A minor….
머리로 건반 위치를 찾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건반을 내리눌렀다. 맑은 피아노 선율이 교실 뒷벽을 타고 퍼져 나갔다. 아이들은 수다를 멈췄고, 나조차 내가 내는 소리에 압도당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반의 아빠인지, 아니면 이반 자신인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소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이건 이반의 기억도, 아빠의 판단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순수하고 정직한 감각이었다.
그날 점심시간, 운동장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이해’하려 했던 게 아니라 ‘지도’하려 했던 건 아닐까. 내 기준이라는 틀에 아이를 억지로 구겨 넣으려 했던 건 아닐까.
나는 오늘 그 작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장이반의 재능’을 온전히 인정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칭찬도, 거창한 격려도 없었지만, 내 손끝을 통해 전해오는 전율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가 만든 지도보다 훨씬 더 넓고 아름다운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