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으로 산 몇일(6)

2막 2장 – 작은 세계의 밤

by 조성길

저녁 설거지가 끝난 후, 거실엔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자리가 생겼다. 엄마는 안방에서 노트북 앞에 앉아 다시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준우는 식탁 한쪽에서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막내 현아는 거실 한복판에 인형 세상을 차렸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는 대신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낯선 고요함이 흐르던 중,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아니, 말투가 좀… 다르잖아. 되게 착해졌어. 어색하게.”

나는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착해지면 좋은 거지, 임마.”

“흠… 평소엔 그렇게 생각 안 했으면서.”

준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준우의 책상을 힐끔 훔쳐봤다. 삼각형의 성질, 넓이 계산. 아침에 내가 이반의 뇌(?)로 그토록 고전했던 바로 그 문제들이었다. 내 머릿속엔 공식이 선명한데, 정작 연필을 쥔 손은 움직이지 않았던 기이한 경험.

“그거, 재밌어?”

내 질문에 준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어? 이거? 음… 그냥 풀면 돼. 재밌다기보다는 당연한 거잖아.”

“당연하다고?”

“응. 보자마자 각이 보이거든. 이건 이등변삼각형이라 이 각은 자동이고, 넓이는 밑변 곱하기 높이 나누기 2. 딱딱 떨어지는 게 기분 좋잖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실감했다. 아, 이게 내가 이반에게 그토록 강요했던 ‘수학적 재능’이구나. 준우는 턱을 괴며 덧붙였다.

“형이 음악 할 때랑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숫자를 보면 그림처럼 보이거든. 형은 소리를 들으면 머릿속에 곡이 바로 그려진다고 했잖아. 난 그게 더 신기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은 몸속에,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이 아이들의 몸속에, 저마다의 정교하고 선명한 세계가 들어 있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기준표로는 결코 잴 수 없는 세계였다.

그때, 현아가 인형 하나를 내 무릎 위에 툭 올려놓았다.

“이반아, 너는 이 인형 할래?”

여동생이 오빠 이름을 부르는 게 여전히 낯설었지만, 나는 순순히 인형을 받아 들었다.

“응… 얘 이름이 뭐야?”

“얘는 ‘조이’. 항상 웃고 있어. 근데 사실 가끔 슬퍼해.”

나는 깜짝 놀라 현아를 바라봤다.

“왜 슬퍼해?”

“이반이가 현아랑 안 놀아줄 때. 그리고 엄마 아빠가 무서운 말 할 때.”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저릿했다. 현아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인형을 들고 와 제 무릎에 앉혔다.

“얘는 ‘밀키’야. 자주 울어. 아까 낮잠 잘 때도 엄마 몰래 울었어.”

현아가 만들어낸 인형들의 감정은, 어쩌면 우리 가족이 애써 외면해온 진실의 투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인형의 입을 빌려 집안의 습도와 온도를 말하고 있었다.

현아는 조이 인형을 다시 꼭 안으며 속삭였다.

“근데 이반이가 오늘 다정해서 조이가 안 슬퍼할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반의 작은 손으로 현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다.

그날 밤, 이반의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낯선 손, 낯선 심박수, 낯선 호흡.

하지만 이 몸이 감당하고 있던 무게, 그 안에 고여 있던 감정과 시선들이 이제는 조금씩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커튼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마치 멜로디처럼 들려왔다. 이반은 매일 밤 이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눈을 감자 현아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항상 웃고 있어. 근데 가끔 슬퍼해.”

그건 어쩌면 아빠인 내가 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반’이라는 아이에 대한 가장 정직한 설명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반의 몸을 빌려, 비로소 내 아들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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