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으로 산 몇일 (5)

2막 1장 – 저녁의 풍경은 말이 많다

by 조성길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맞이한 건 현관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신발들이었다. 평소라면 “신발 좀 똑바로 벗어두라고 몇 번을 말하니!”라며 불호령을 내렸을 현아의 분홍색 슬리퍼와 둘째 준우의 흙 묻은 운동화.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신발들 사이로 내 작은 실내화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눅진한 된장국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내가 퇴근할 때면 늘 집안을 채우고 있던 냄새였지만, 한 번도 이 냄새가 아내의 하루가 끓어 넘친 결과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녀왔습니다….”

낯선 고음의 목소리. 하지만 평생을 써온 익숙한 인사말.

“이반이 왔네?”

주방에서 아내—아니,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와 눈가에 내려앉은 그림자. 남편일 때는 ‘집에 있는 사람이 왜 저렇게 자기 관리를 안 하나’ 싶어 못마땅했던 그 모습이, 이제야 비로소 '노동의 흔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방 벗고 얼른 손 씻고 와. 오늘 학교에서 힘들었지?”

“네… 좀요.”

거실로 들어서니 일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막내 현아는 인형들과 소꿉놀이에 열중해 있었고, 준우는 소파에 거꾸로 매달려 수학 문제집을 넘기고 있었다. 아무도 내 안에 쉰 살의 아빠가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만의 평온한 저녁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식탁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과 두부조림, 노란 계란찜이 올랐다. 늘 먹던 반찬인데 어쩐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생경했다. 아빠로서 먹던 밥은 '당연한 권리'였지만, 아들로서 마주한 이 밥상은 엄마의 '희생'이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엄마가 내 밥그릇에 두부를 얹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학은 역시 좀 어렵더라고요. 근데… 영어는 괜찮았어요.”

“어머, 웬일이니? 영어 선생님이 오늘 너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문자까지 주셨던데.”

당연했다. 비즈니스 미팅과 해외 컨퍼런스로 다져진 내 영어 실력이 고작 초등학교 수준에서 막힐 리 없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칭찬 한마디에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며 묘한 가책이 느껴졌다.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이런 환한 미소를 준 적이 언제였던가.

순간, 엄마가 젓가락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반아, 너 오늘 정말 이상해. 말투도 그렇고, 눈빛이… 어른 같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계란찜을 크게 한 입 떠 넣었다.

“사춘기인가 보죠, 뭐.”

엄마는 피식 웃으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조용하니까 집안이 다 차분해진 것 같네. 가끔은 이런 이반이도 좋다.”

그 말은 예상치 못한 곳을 찔린 듯 아팠다. 엄마에게 이반은 늘 시끄럽고 사고 치는, 그래서 '조용해지길 기대받는' 존재였던 걸까.

식사가 끝난 뒤, 엄마는 아이들을 씻기고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거실 소파에 앉아 TV 채널을 돌리며 아내에게 과일이라도 깎아 오라고 했을 시간이지만, 나는 물 컵을 든 채 조용히 안방 문 앞에 섰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함께 타닥타닥, 신경질적인 키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방 안을 훔쳐보았다. 아내는 화장대 옆에 급하게 마련한 좁은 간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위엔 ‘어린이 논술 지도법’과 ‘아동 문학의 이해’ 같은 해진 책들이 빼곡했다. 모니터 화면 속에는 동화 원고로 보이는 문장들이 줄을 지어 채워지고 있었다.

아내는 작가였다. 동시에 아이 셋의 일상을 책임지는 매니저였고, 가계를 돕는 논술 교사였다. 그 세 가지 역할을 하느라 아내의 손목엔 파스가 붙어 있었다. 남편으로서 나는 아내의 파스 냄새를 그저 ‘나이 들어서 나는 냄새’ 정도로 치부했었다.

아내가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뻐근한 손목을 주무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반이는 요즘 왜 자꾸 나랑 멀어질까. 내가 너무 몰아붙이는 걸까.”

그 목소리엔 자책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가 ‘아빠’의 자아로 살던 시절, 식탁에서 던졌던 독설들이 떠올랐다.

“애 좀 그만 감싸. 당신이 그러니까 애가 나약해지는 거야.”

“그런 예민한 성격 다 당신 닮아서 그런 거 아냐?”

내가 무심히 던진 말의 파편들을 아내는 혼자서 다 맞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동화라는 환상의 세계로, 그리고 늦은 밤의 독백으로 간신히 치유하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문틈 너머로 보이는 아내의 구부정한 등 위로 내가 지워준 '가족'이라는 무게가 얹혀 있었다. 나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한 채, 이반의 작은 손으로 물 컵만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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