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으로 산 몇일(4)

1막 4장 – 귀로 먼저 기억하는 아이

by 조성길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소란스럽던 복도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고요함 뒤로 숨어 있던 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급식실 카트의 육중한 철제 바퀴가 복도를 긁는 소리, 누군가 떨어뜨린 빈 우유 팩이 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 복도 끝 화장실 문이 삐걱대며 닫히는 날카로운 마찰음까지.

모든 게 너무 크게 들렸다. 단순히 귀가 예민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반의 몸은 원래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리 하나하나가 피부에 닿는 촉각처럼 생생하게 박혔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음악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뒤쪽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오늘도 부를까?”

“이반이 지난번에 불렀던 거 있잖아. 가을 낙엽 뭐시기… 그거 진짜 좋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선율 하나가 일어났다. ‘생각이 났다’기보다는, 기억 어딘가에 저장된 음원이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들려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반의 몸 안에서 박자와 음정이 정교하게 울려 퍼졌다.

‘도… 미… 솔… 미… 도….’

나는 무심코 책상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건반을 누르듯 리듬을 툭툭 두드렸다. 머리로 계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익숙한 순서와 강세로 책상을 타격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유석이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또 그 노래 생각나지? 아까부터 계속 두들기고 있더라.”

나는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그랬어? 아냐… 그냥 무의식중에….”

하지만 부정하는 내 대답과 달리, 내 손가락 끝은 이미 멜로디의 다음 구절을 향해 움찔거리고 있었다. 툭— 툭툭— 톡.

“오늘도 이반이가 부르면 좋겠다.”

뒷자리 어딘가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나를 한참 동안 멈추게 만들었다.

‘좋겠다니….’

나는 그동안 이반에게 어떤 말을 했던가. 음악은 그저 잠깐 즐기는 취미일 뿐이라고, 이걸로 밥 벌어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고 차갑게 못 박았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이 세계 속에서, 내 아들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기대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치’라고 불렀던 그 소리로 누군가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 오늘은 노래 연습 전에 지난 시간에 배운 악보부터 복습하자. 다들 꺼내 봐.”

나는 서둘러 가방을 뒤적였다. 책 사이에 끼워진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오선지 위의 검은 음표들이 마치 줄을 타고 걸어 다니는 생물처럼 보였다. 눈으로 악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한 듯 소리가 차올랐다. 머리가 아니라 귀와 손끝이 먼저 반응하는 기묘한 감각.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의 합창이 교실 안으로 번져나갔다. 조금씩 음정이 어긋나고 박자가 흔들리다가도, 어느 지점에선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서툰 흐름. 그 안에는 완성된 기술보다 더 뜨거운, ‘기억’이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이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서 아무 말 없이 책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소리가 기억의 주인이 되고, 리듬이 몸의 주인이 되는 삶.

이반의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 대신 살아보고 있는 이 아이의 하루가 결코 가볍거나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이반으로 살았던 몇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