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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Nov 08. 2022

일이 잘 풀릴 때, 그렇지 않을 때

Writer's block Diary : 25일째 

Photo by Alina Grubnyak on Unsplash


"누나도 슬럼프가 있어? 어떻게 이겨?"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매일 매일 하루 하루가 다 슬럼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웬만해선 내가 거의 이기는데, 이기지 못할 때도 많다고 했다. 글쓰기에서도 다를 게 없다.


만화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로 출발해보자.


에반게리온의 로봇 파일럿은 '싱크로'라는 방법을 통해 로봇을 움직일 수 있다. 파일럿은 로봇 내부의 양수와도 같은 액체에 담긴 채 로봇과 의식을 연결하여 마치 자기의 몸처럼 로봇을 부린다. 마치 강령술을 써서 자신의 몸에 힘센 장수를 빙의한다는 고대 술사들처럼. 영화 <아바타>보다 훨씬 전에 제시된 이 방법은 그러나 싱크로율이 지나치면 본인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폭주하게 되는 위험을 늘 안고 있다.


나는 그와 같은 의식의 연결이, 꼭 캐릭터에 감정 이입하는 소설가의 작업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설가는 언제나 인물을 부린다. A에서 B를 거쳐 Z로 이어지는 경로로 이동하는 동안에 캐릭터를 마치 자신의 몸인 것처럼 움직이고, 그들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인 양 느끼고 생각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 실감나는 것은 그만큼 캐릭터와의 동조율이 높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도 이러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 경우 특정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일상 생활을 하다가 멍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


가령 그 캐릭터가 할 법한 대사라든지, 막혀있던 지점이 있다면 그와 전혀 다른 국면이 떠오른다든지, 아무튼 쓰고 있지 않은 동안에도 뭔가가 꾸준히 진행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들이 나타나 본체인 나의 의식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는 것이다.


꿈속에서 힌트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런 징조없이 아무때나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메모는 필수이며, 종이든 노션이든 하다못해 핸드폰 녹음기에 음성 메모를 하든 휘발되기 전에 그 말들을 붙잡아둘 필요가 있다.


이런 파문은 잔잔한 기쁨인데, 이 맛에 소설을 쓰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동시에 여기에 없다. 이야기는 멈춰있으며, 내가 쓰지 않으면 절대로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대 뒤편에서는 내가 쓰기만을 기다리면서 뭔가가 끊임없이 계속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쓰는 동안에만 사는 것 같다는 작가의 말이 완전한 헛소리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어느때고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데, 이 미소는 남들이 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범죄자의 음침한 그것과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아이나 식물을 기르는 양육자의 그것과도 얼핏 닮아있다(고 나는 믿는다).


출근길 소설 쓰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은 지난 것 같다. 제대로 쓴 날에는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루치 일을 다 끝마친 기분이 든다. 남은 시간동안은 모두 자유 시간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출근 후에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더없이 가볍고 맑다.


반면 제대로 쓰지 못한 날의 고통은 하루를 망치기에 충분하다. 어제도 그랬지만, 그런 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기술도 쓰는 자 꼭 마련해야 할 기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기분 나쁨에 집중하면 기분 나쁨은 더 큰 기분 나쁨이 되고, 더 오래가는 기분 나쁨이 되기 십상이니까. 그렇게 되면 다음번엔 더 쓰기가 버거워질지도 모르니까. 사실 그런 식으로 망했다고 생각해서 중단한 글들이 내 PC에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처럼 꽤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나뭇가지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했던 적이 많은데, 전부 실패했다. 내 시간만 들었고, 내 힘만 들었으며, 내 마음만 다쳤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의 슬럼프라는 놈이다.


고양이를 기르면서도 늘 느낀 거지만, 글쓰기에서도 내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의 것들이 있다. 요즘에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중인데,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보는 중이다. 때가 되면, 기회가 닿으면, 뭐라도 되면 좋지. 되어도 말고.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없는 것들, 힘이 닿지 않는 것들, 마치 악의를 갖고 내 길을 일부러 훼방 놓는 것 같은 것들 앞에서, 오늘도 강제로 도를 닦으며 가끔씩 내가 흥얼거리는 건 김종서의 오래된 노래 한 구절이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지려 하지마, 꿈은 꿈대로 남겨 둬~"


그러면 기타가 울고, 내가 예상하지 못한 노래가 시작될 수도 있다. 아님 말고. 오늘만 날은 아니며, 쨍하고 해뜰날은 원하든 원치 않든 또 찾아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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