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로 머리 올린 글

지리산 천왕봉 등산 여행

by 오각로 강성길

`여정이었다.`까지 보신 분들에게는 행운이 - - -.

그리고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지리산 천왕봉 등산 여행


대구에서 진주에 가는 것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여정이다.

대구 서부 버스 터미널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있으면 기다리지 않아서 좋고, 좀 기다린다 생각되면 서부 터미널 옆 관문 재래시장을 돌아볼 수 있기에 좋다.

이번 등산 여행은 가는 것부터 모두 내 마음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시 말하면 제 멋대로 산행 여행인 셈이다.

혼자 떠나는 길은 설렘은 있어도 두려움은 없다.

머리를 비우고 가기 때문이다.

진주행 버스 출발은 아직 40여분 남아 있다.

정류장 옆에 자리 잡은 관문 재래시장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일요일이라 대부분 가게 문은 닫았지만 워낙 크고, 다양해서 그런지 군데군데 문을 연 상점만으로도 웬만한 전통시장을 능가하고 품목 또한 다양하고 풍부했다.

관문 시장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는 것은 연세가 지긋한 노인분들이 텃밭에서 기른 채소들을 조금씩 내다 파는 모습이다.

이런 풍경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현상은 거의 전국적인 광경이기 때문이다.

`몽땅 팔아도 만원이 넘을까 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졸으시면서 지나가는 여행자에게는 바람이 있는 눈길을 주신다.

길거리에 정리된 채소들은 나물 또는 쌈이 대부분이다.

간혹 눈에 띄는 특이한 농산물은 한 사발 정도 되는 땅콩이나 은행 정도이다.

할머니 눈길을 길에 널 버려두고 50여 미터 정도 지나면 전통 재래시장이다.

일요일이라 드문드문 가게 문을 열어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상품 종류별로는 대부분 만족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구경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어슬렁거리다가 두 팩에 2500 원하는 떡을 사고, 바나나도 샀다. 시간 개념 없이 돌아다녀도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전통 시장을 구경하고 진주행 버스 출발 홈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보았다.

승객 모두가 가볍게 들뜬 모습처럼 보였다.



대구에서 진주까지는 약 2시간 전후 걸리는 거리였다.

남부지방의 중심에 자리 잡은 진주시는 처음 가는 도시이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버스는 황급하게 진주로 허둥대며 가고 있었다.

어지간한 속도로 달리는 승용차까지 추월하는 우리 기사양반은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기사 양반의 성깔에 맞게 예정 도착시간보다 10여분이나 앞서 진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미리 진주시에 대하여 알아보고 갔으므로 방향만 어딘지 모르지 무엇이 어느 곳에 있는지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진주 터미널에서 버스 시간표와 요금표를 확인하고 특히, 지리산 중산리 방향 버스 편을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첫차가 오전 06:10 출발에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고 매표소 여직원이 알려 주었다.

새벽에 김밥 등을 파는지 여부도 물어보았다.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터미널 내에서 잠시 머물렀다.

진주에는 `중앙시장`이라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기에 중앙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주시만의 정취를 느끼려고 좌우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횡단보도에서 나이가 50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에게 찜질방이 근처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중앙시장 쪽으로 있다`고 알려주었다.

가르쳐 준대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낮인데도 불구하고 침침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선술집 또는 맥주 집이 집단화되어 있는 지역으로 입구부터 조금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왔다.

그리고 주변에는 허름한 여관들이 골목길을 따라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낮이 밤같이 느껴지는 곳 한가운데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찜질방이 있는 건물이었다.

아무튼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다.

위치만 알아보고 진주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주성은 논개의 역사적 실화로 충절이 그리고 진주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진주성 전투를 이끌었던 역사적 유적지로 온 국민과 진주시민이 성지처럼 여기는 유적지이다.

진주시를 휘감아 흐르는 남강 절벽에 자리 잡은 진주성은 그 유명한 의암(의로운 바위)이 있고, 촉성루가 있고,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서문에 들어서자 촉성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3대 누각은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 그리고 이곳 진주의 촉성루이다.

건축규모로 볼 때 누각으로는 제법 큰 규모에 속한다.

절벽에 자라 잡고 있어 굽이치는 남강이 넉넉하게 조망되는 곳이었다.

굴곡지어 흐르는 강물을 따라다니던 바람이 잠시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주고, 머물다가 가는 곳 또한 촉석루였다.

촉석루 앞 절벽으로 내려가면 유명한 논개의 역사 실화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의암이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논개의 충절 비석 옆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오늘도 뭉클하게 한다.

진주 사람들에 의하면 지금은 물이 많이 불어나서 논개가 일본 왜병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내린 의암이 많이 물에 잠겼다고 아쉬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논개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에는 논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진주 토박이들이 그네들끼리 하는 대화 내용에는 어렸을 적에 보았던 초상화하고는 완연히 다르다고 한다.

무엇이 다를까 궁금해하면서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았다.

머리에는 그 당시 기생을 의미하는 꼰 머리를 하고 옥가락지를 끼고 있었단다.

지금은 단아한 얼굴로 그 당시보다는 오히려 요즘에 더 선호하는 갸름한 미인형의 얼굴에 부드러운 한복 차림이었다.

어쩐지 진주시는 아니, 진주성은 그 자체가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적 유적지였다.

촉석루 처마 그림자를 밞으며, 진주 성벽을 따라 강을 보면서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과 객들의 향기를 맡으면서 혼자 무심히 걸어갔다.

곳곳이 유적지라 머무는 곳마다 사념에 잠기게 된다.

다리도 쉴 겸 휴게소에서 커피를 시켰다.

시선을 강 건너 저 멀리 진주시 전 지역으로 투망 던지듯 던져 놓는다.



휴게소는 진주성 서편 언덕에 위치해 있다.

사방이 잘 보이는 곳으로 진주성에 모든 바람과 햇볕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먹먹한 가슴이 잠시 휴식으로 해갈이 되면서 발길은 자연스럽게 진주 국립박물관 쪽으로 가고 있었다.

4월의 마지막 날 역사 속으로 여행하는 것은 행운이었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 발자국 옮길 적마다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서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왕 시절 당시 국제적으로 조선은 선진국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이 활발하게 역동적인 에너지를 비축할 때에 당쟁의 본질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영남학파의 득세로 보수적인 유교 쪽으로 깊게 빠져드는 시기였다.

충성과 예의 등 지배자 중심의 사상이 계속 강화되는 시기였고, 그와 반대로 민중은 유교의 사회에서 빈곤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하였다.

민생은 요즘 말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시기에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고자 하는 주축은 평화 시절에는 괄시받던 농민 그리고 지방 하급관리 등이었다.

지배계급인 왕과 주변의 양반들은 오히려 국가와 국민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과 과오를 연속하여 저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더욱 분명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당시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자료들이 발길을 사로잡을 때마다 가슴은 더욱더 먹먹해지고 있었다.

역사적 유물을 실제 보면 볼수록 진주 시민 즉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과 싸우다 그야말로 장열 하게 전사하는 모습이 대형 화면으로 전시관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전시관 전체가 나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워질 때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 당시와 같은 점은 없는가? 단호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지도층의 언행일 것이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거짓말과 부패로 정치를 가볍게 하고 있다.

그러한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경고가 아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나타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이 역사 진주 박물관에서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박물관에 들어갈 나와 나올 때에 나는 똑같지만 나의 생각에는 변화가 있었다.

그 외에 진주성의 유적들이 나에게 많은 메시지를 계속 던져주고 있었지만 논개와 박물관에서 너무나 깊게 각인된 개념 때문에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았다.

진주성을 나오기 전에 북쪽에 있는 누각에서 생각을 정리하여 멀리 보이는 진주시내에 뿌려 본다.

진주성이 현대인에 던지는 메시지를 말이다.



진주성을 감싸고 흐르는 남강은 진주시의 상징성이 매우 강하다.

우선 진주시 중앙을 관통하고, 흐르는 곳곳이 절경이며 또한 강물이 깨끗하다.

남강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강 어디에서도 접근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진입로가 구성되어 있다.

벌써 마음은 바람 따라 한가롭게 남강을 배회하고 있었다. 남강은 강변이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고 수량이 많아, 보기에도 시원할 뿐만 아니라 굽이치며 흐르는 경관이 아름답다.

발길이 물가에 다가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마음은 평온해졌다.

`강변에 잘 자란 나무와 기암절벽이 강과 하나가 되어 진주시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이 미치자, 남강이 진주의 고향이었다.

저녁시간 대부분을 남강과 함께한 것이 진주시 여행에서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다.

저녁밥을 먹고 미리 알아본 찜질방에서부터 지리산 여정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잠을 설치면서 새벽을 맞이했다.

새벽 6:10분 진주를 출발하는 중산리행 버스는 이른 아침만큼이나 바쁘게 운행이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지리산에 간다는 것은 `인내가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난폭운전에 적당한 장소에 하차 등등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버스는 중산리 종점에 닿았다.

내려서 바로 간이 정류장에 들려 돌아갈 버스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오후 5시 전까지만 하산하면 진주를 거쳐 대구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시간표를 보고, 시계를 보니 오전 07:30분이었다.

조금 여유가 생가자 그 틈을 이용하여 나의 가슴에 들어오는 지리산의 청량한 공기, 폐의 포낭까지 긴 잠에서 깨우는 공기였다.




예상대로 평일이라 등산객은 드문드문 있었다.

정류장에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 등산객을 볼 수 있었다.

본격적인 등산로 입구 전 중간쯤 도달했을까 젊은 연인이 사뿐히도 올라가고 있었다.

`소리가 있는 펜션` 앞에서 가쁜 숨을 고른다.

봄 단풍(벚꽃이 지고 난 다음 붉은빛이 남아 있는 상태를 나는 봄 단풍이라 칭함)이 조금 남아있는 길가에는 바람과 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엷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촘촘히 그리고 넓게 모여 있었다.

이런 길이 끝날 즈음 드디어 천왕봉 등산을 알리는 국립공원 탐방로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번 정상까지 가지 못한 아쉬운 추억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국립공원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올라가면 오후 5시 전에는 내려올 수 있는가`를 말이다.

고개만 끄덕이는 산 사나이 국립공원 직원과 인사하고 긴장된 첫 발을 정상을 향하여 내디뎠다.

가는 길 내내 가랑비가 내리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고 이런 상태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구름에 겹겹이 쌓인 지리산은 사방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지리산은 초보 등산객에게 유난히 불친절하였다.

1시간 정도 등산 후에도 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평일이다 보니 등산객을 보기가 어려웠다.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산객만 가끔 마주치었다.

무언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여주리라` 하산의 나의 모습을 그려가며 두어 시간 천천히 올라갔다.

구름에 감춰진 지리산은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지리산 속살에 감탄은 계속되고 있었다.

계곡에서 잘 자라는 음지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3부 능선 정도이다.

구름 속에서 지리산을 오르고 있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산길은 무능 도원이고 낙원같이 느껴졌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합께 가야 한다` 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색하게 혼자 가는데도 함께 가는 사람들에 처지기 시작했다.

방금 4명이 젭 싸게 나를 제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등산객들도 지리산이 처음인지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고, 땀인지 비인지 또는 구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능선을 돌아가면 조금 보이던 시야도 점점 짧아지더니 이내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이젠 어느 정도 능선에 올라왔는지 가름할 수조차 없고, 사람을 밀어낼 정도로 강한 바람이 등산 내내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악의 산행을 극복한 덕분에 드디어 산장이 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게 해 주었다.

이정표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단지 2칸 정도의 풍경만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인생에 대하여 사념에 잠긴다.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인생 칠십 고래희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의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나그네 마음 암연히 수수롭다`라는 구절이 이마의 땀과 함께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제는 발도 몸도 지쳐있었다.

그저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에 솟은 혹은 널브려져 있는 자갈 바위만 보일 뿐이다.

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높을수록 단순한 것은 마치 인생과 흡사했다.

그만큼 몸은 지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국립공원 로터리 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우 반가웠다. 조그만 산장은 사람으로 꽉 차있었다.

사람과 비례하여 인정 또한 가득했다.

어렵사리 공동으로 사용하는 식당 한 곳에 자리 잡았다.

대구 전통 시장에서 사 온 떡과 바나나 그리고 진주에서 사연이 있은 김밥을 먹고 있었다.

중간에 만났던 4인조 등산객이 먼저 짐을 풀고 막걸리 등을 먹고 있었다.

지리산이 사람을 후덕하게 하는지라 잘 익은 막걸리 한 컵을 건네면서 빙긋이 웃고 있는 등산객, 아니 산 친구가 있지 않은가?

사람의 웃음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이곳 대피소에서의 웃음은 천사와 같았다.

꿀 맛 같은 휴식을 하고 배낭을 다시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로터리 대피소의 풍경은 비 오는 날에 오두막집 같고,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구름이 되는 곳이기에 사람까지도 구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산장을 출발한 후 1시간 정도에 해달 1200m가 넘는 곳에 법계사라는 사찰에 도달했다.

그렇잖아도 적막한 산사에 비까지 내리니 다시없는 절간 법계사였다.

어쩌다 한 무리 구름이 내려와 풍경을 치는 소리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법계사의 전설에 의하면 절이 융성하면 일본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지리산 봉우리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지리산에 흐르는 정기를 끊어 놓았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로 정상에서 뽑아낸 쇠말뚝을 절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법계사를 더욱 융성하도록 기틀을 마련하고자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이 의기투합을 하였다`는 안내문이 외로이 산 나그네를 처연히 맞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법계사를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길은 또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오히려 아픈 것인지 안 아픈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상태 즉 `무아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갈수록 길은 미끄럽고, 능선을 넘을 때마다 바람에 날아갈 듯하다.

강풍이 어느 정도 높은 고산 지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번 장터목 대피소에서 도중 하산한 안타까운 추억이 있은 터에 다시 찾은 지금, 그때의 감회가 머리에 다시 떠오른다.

대피소와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오니 등산객 모두가 마치 에베르트 산을 정복이나 한 듯한 진지한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정상이 대부분 그렇듯이 마지막 500여 미터 남겨놓은 곳은 험악한 것이 일반적이다.

지리산도 예외는 안이었다.

제법 가파른 절벅 그리고 위험한 등산로를 따라 한발 한발 옮기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위를 쳐다보니 젊은 남녀가 중산리 입구 `소리 나는 펜션`에서 앞질러 올라간 이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만났다.

나는 올라가고 연인은 내려가는 어찌 보면 바람과 같은 인연이었다.

사람의 인연이 이와 같이 않을까?

스쳐가는 사념도 잠시, 비와 바람과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하면서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다다랐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상은 바위였다.

강한 바람을 등지고 천왕봉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였다.

주위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마침 구미에서 왔다는 등산객에게 핸드폰 사진을 부탁했다.

어정 정한 자세로 `올라왔다`는 순간을 핸드폰에 저장하였다.

핸드폰 배터리(17%)를 걱정하며 배우자에게 지리산 정기를 문자로 허겁지겁 나르고서야 비로소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해탈의 기분이었다.

정상에서의 뭉클함이 서서히 색즉시공이 되었다. 주위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을 천왕봉에 남겨두고 다시 하산을 준비하였다.

내려갈 때에는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지루함과 함께 서 너 시간이 소요되었다.

오던 비도 멈추고 올라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간간이 올라오는 무리는 국립공원 로터리 대피소에서 숙박을 하거나 정상을 오른 뒤 조금 내려와 장터목 대피소에서 묵거나 하는 일정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는 전문 산악인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다 만나는 늦깎이 등산객은 기운이 넘쳐 나는 듯 부지런히 등산을 한다.



올라오는 등산객을 하나 둘 보내고 나서야 중산리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주 편안하게 중산리에서 진주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여유가 넉넉한 산행 여행은 아마 지금일 것이다.

거의 한 시간마다 있는 버스는 오히려 지리산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리산을 벗어나기 직전에 몰려오는 한가한 여유, 아마도 산행 여행에서 주는 부가적인 행복이라고 할까 가벼우면서 진한 맛이었다.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진주로 가는 길은 속세와 현세를 이어주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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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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