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 여행의 뜻밖에 참맛

비 오는 날 삿포로

by 오각로 강성길


삿포로의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금세라도 빗방울이 흩뿌릴 듯, 공기는 눅눅하고 서늘했다.

여행길에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시간은 아침 식사다. 넉넉한 음식과 여유로운 분위기, 그 한가로운 순간이 나의 하루를 열어 준다. 그날도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가득 담은 테이크아웃 컵을 손에 쥔 채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이미 고운 가랑비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방랑자의 기질이 깨어났다. 계획과 이유를 떠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만 하는 충동 말이다. 삿포로의 아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원래는 ‘비바이’라는 소도시를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빗물에 씻기듯 사라져 버렸다. 대신 낯선 이름 하나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잔케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나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젊은 여인에게 더듬거리며 “스미마셍… 고잔케이?” 하고 묻자, 그녀는 짧게 웃으며 같은 단어를 되뇌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여행길의 소통은 언제나 최소한의 말과 미소로 완성되곤 한다.

급행버스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버스는 삿포로 시내 곳곳을 빠짐없이 정차하며 천천히 달렸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도심의 빌딩, 변두리의 작은 집들, 산과 들, 강물과 사람들의 얼굴이 빗줄기 사이로 번져 보였다. 한국의 빠른 리듬에 익숙한 내게 그 느린 흐름은 오히려 낯선 평온을 전해 주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고잔케이는 온천과 계곡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인생이란 결국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 위에 세워진 집과도 같지 않은가. 다행히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고, 그 길은 나를 계곡과 신사의 세계로 이끌었다. 신사 앞에 놓인 작은 족탕 안내판에는 ‘Free’라는 익숙한 단어가 적혀 있었고, 그 사소한 글자가 주는 친근감에 미소가 번졌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서든 삶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사람들의 몸짓, 빗속에 묻어나는 표정까지, 자연의 품 안에서 삶은 결국 비슷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계곡 다리에 이르렀을 때, 문득 고독이 밀려왔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풍경 속에서, 홀로 걷는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 순간, 뜻밖에도 외국인 부부가 다가와 “Hello”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나도 얼떨결에 답을 건네자, 짧고 소박한 교류만으로도 낯선 고독은 사라졌다. 여행은 이렇게, 작은 인연 하나로 마음을 환하게 밝히곤 한다.

돌아오는 길, 다시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정류장에서 만난 젊은 여인은 우산도 없이 두 손으로 빗줄기를 막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우산 속으로 손짓했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다가왔고, 우리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십여 분 남짓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 그녀와의 대화는, 이번 여행이 남긴 가장 뜻밖의 선물이었다.

여행의 참맛은, 어쩌면 이런 순간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계획에 없던 길, 낯선 사람과의 짧은 인사, 그리고 소나기 속 우산이 만들어 준 특별한 공간. 그 모든 것이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나는 버스 창가에 앉아 젖은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짧은 인연으로 스쳐간 인도네시아 여인의 앞날에, 조용한 행운이 함께하기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말레이시아 키나발루산(4,095m) 등반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