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 6. < 숙련 > ep16. 조율자가 되는 것
당신이 이렇게 방관자가 아닌 조율자가 되어 다양한 상황과 사업 현황에 따라 균형감을 가지고 원활하게 일을 풀어가면 참 좋겠어요.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대할 때 그 해결과정 안에서 자신의 적절한 역할 판단을 이어가면서 말이죠.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여러모로 이해가 더 빠를 것 같은데요, 당신이 지금 담당 사업을 매우 바쁘게 진행하고 있는 시즌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당신의 가까운 동료가 자신의 일에 대한 업무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친절한 당신은 조금 무리스럽지만 본인 업무수행과 더불어 동료의 일에도 도움을 주기로 약속을 했죠. 그런데 약속을 하자마자 곧 또 다른 동료가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당신이라면 이때 어떻게 대응하겠어요?
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황일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 간의 친밀도나 부서 업무 연관성이 확실히 차이가 있다면 좀 더 그 판단이 쉽겠지만요.)
물론 조직 구성원끼리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일종의 협업을 바탕으로 일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기본이지만, 당신이 가진 시간과 에너지는 분명 한계치가 있습니다. 숙련된 활동가라면 이런 상황에서 모든 요청에 본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려해 볼 것입니다.
일 자체를 함께 해주기보다는 문제를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업무툴을 제안하거나, 관련된 구체적 조언을 통해 일의 수행은 그가 직접 진행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전달하고 성숙한 균형을 이루는 단계가 바로 ‘숙련’의 단계이니까요.
흔히 이런 조율자-조력자-촉진자의 역할을 하는 이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라 부릅니다. 숙련된 당신은 이제 동료들에게 단순 러닝메이트로서의 역할을 넘어, 이런 퍼실리테이터의 위치에 올라서야 할 것이에요.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퍼실리테이션이란, ‘중립적인 위치에서 집단 활동 프로세스에 관여하여 팀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원하는 행위’를 말해요.
좁은 의미에서 퍼실리테이션은 회의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활동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조직 내 혁신과제 등의 문제해결 과정을 촉진하는 활동 전체를 뜻하기도 하죠. 최근에는 후자의 조직문화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한 것 같아요.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개인과 그룹 안에서 집단지성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최적의 프로세스와 환경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바로 퍼실리테이터라고 하고요.( 사실 퍼실리테이터가 가지고 있는 세부적인 영역과 역할 전체를 포괄하는 번역어는 없어요. 대부분이 해당 외래어 표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이미 조직 안에서 숙련 그룹에 속한 당신은 이러한 퍼실리테이터 역할을(원하던 원치 않던) 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에요. 특히나 비영리단체에서는 구성원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절차와 개별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크겠죠. 본인이 논의 구조를 세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조율자적 기술은 꼭 필요합니다.
게다가 조직 운영 안에서는 중요한 업무적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기고, 부서와 부서 혹은 개인과 개인 간의 갈등도 발생하며, 때로는 아주 새로운 창의적인 플랜을 동료들과 함께 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퍼실리테이션은 다양한 사람들 간의 의견 교류를 통해 집단 지성을 끌어내고, 그 해결책을 정렬해 내기 무척 유효해요.
그렇다면 이런 기술적인 훈련이 되어 있으면 누구라도 퍼실리테이터가 될 수 있을까요? 방법론에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퍼실리테이션 도구와 자료들이 인터넷상에 존재하며, 전문적인 퍼실리테이터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들도 이미 여럿 존재합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국퍼실리테이터협회, 쿠퍼실리테이터그룹 등의 전문 퍼실리테이터 양성 기관의 사이트를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 필요성을 누구보다 가까이 느낀 실무자들이 그곳에서 다양한 진행 방식에 대한 기술을 익히기도 하죠.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퍼실리테이션은 단순 진행 기술(Skill)이 아닌 진행자의 자세/태도(Attitude)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해당 논의에 참여하는 이들을 퍼실리테이터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문제 해결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입니다.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그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퍼실리테이터의 강한 믿음과 의지를 바탕으로 상호 적극적인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퍼실리테이션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체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어찌 보면 맹자나 루소와 같은 이들이 말하는 성선설(性善說)과 그 결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죠.)
‘모든 의견은 동등하게 소중하다’라는 퍼실리테이션의 슬로건처럼 타인의 의견을 평등하게 수용하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받아 안을 수 있는 넓은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이처럼 당신이 부서와 부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섬세하게 조율하며, 자연스럽게 조직 안에 서로를 북돋는 역할을 맡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의 활동도 점점 더 숙련될 것입니다. 어느새 당신은 신입 활동가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조직 안에서의 역할도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제법 규모가 큰 조직에 근무한다면 퍼실리테이션의 방법론은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 같아요.
대체로 소규모 조직의 경우에는 조직 안의 구성원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소통이 가능해 그 가운데에 서로 간의 이질성의 영역이 많이 상쇄되죠. 그렇다면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즉각적이고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또한 가능하고요. 하지만 조직 규모가 클수록 그러한 소통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집니다. 구성원들 간의 이질성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그러한 이질적인 대상들 간의 세밀한 소통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만남의 단위를 쪼개어가는 것만이 대안일까요?
이를 위해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살펴볼 만한 개념인 ‘교량형 사회적 자본(bridging social capital)’에 대해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교량형 사회적 자본이란, 이질적인 사회적 배경과 인구사회학적 특성이 다른 사람들 간의 포괄적 네트워크를 뜻한다고 해요. 이런 교량형 사회적 자본은 약한 연대와 대응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더 넓은 정체성과 상호성을 생성합니다. 또한 회사, 정부, 이익집단 등 공식적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일시적 관계로 절대량적으로는 빈약하지만 폭넓은 대인관계로 보완할 수 있죠.
결과적으로 교량형 사회적 자본은 개인의 다양성을 증가시켜 폭넓은 네트워크로 조직 내 구성원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확장하여 조직성과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교량형 사회적 자본과 반대 지점에 있는 ‘결속형 사회적 자본(bonding social capital)’은 동질적인 사회적 배경과 인구사회학적 특성이 유사한 사람들의 네트워크로 집단 내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자본을 말한다고 해요.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가족이나 친구 등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strong ties)를 형성하여 질적으로 상당히 밀접하고 강한 교류를 갖는 비공식적 네트워크 개념이라 할 수 있겠죠. - 윤리경영연구, <네트워크 사회적 자본이 비영리 조직성과에 미치는 영향> 전재희 외 (2022)에서 참고.)
성숙한 활동가란 이러한 ‘교량(브리지)’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업과 사업을 연결하고, 그리고 그를 통한 전체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 연결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역할을 자신이 속한 조직 안으로만 꼭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히 소속된 조직 안에서의 활동이 보다 우선이겠지만 숙련된 활동가는 이미 비영리 영역이라는 큰 그림을 보고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씬(scene) 전체가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현하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조직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조직 밖에서도 당신의 영향력이 확대된다는 것은 큰 의미에서 무척 긍정적인 일일 거예요.
하지만 숙련된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외부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단체마다 활동영역과 사업부문이 각기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나 조직문화, 활동가 개인들의 성향과 선호 등도 모두 다르기에, 당신이 한 단체의 장이라 하더라도 조직과 조직을 긴밀히 연결하는 것은 여러모로 간단한 일이 아닐 거예요. 그럼에도 연대를 위한 시도를 포기할 수는 없기에, 보다 가벼운 접근으로써 ‘느슨한 연대(Weak Ties)’의 방법을 당신께 제안해 봅니다.
몇 년 전부터 사회 트렌드로 작은 연대체(small solidarity)가 언급되기 시작했죠?( 앞서 설명한 ‘느슨한 연대’와 거의 비슷한 개념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작은 연대란, 실제로 대면하는 것보다 소셜 미디어로 연결된 관계를 더 편하게 여기는 등 기존에 당연하게 여겨졌던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에서 벗어나는 문화 전반적인 특성을 지칭합니다.
사실 이 같은 접근 인식은 아주 새로운 것만은 아닌데요, 가까운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고령화와 더불어 느슨한 연대의 개념이 대두하였습니다. 지역의 독거노인을 중심으로 ‘느슨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모임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고, 한 달에 한두 차례 생존 확인을 겸한 식사 자리를 만드는 등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형태의 연대가 활성화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느슨한 연대는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접근방식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사회구조 전반의 변화에 따라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시민사회 영역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과거 한국사회의 시민단체들은 많은 부분 민주화 투쟁 가운데 성장했기에 태생적으로 연대성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왔다고는 이미 한 번 말씀드렸죠.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시민사회 안의 세대도 달라지고 사회 자체가 다양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 간의 연대보다는 각 단체의 개별 사업이 중요해지며 단체 간 소통도 부족해졌습니다. 물론 최근까지도 이러한 연대에 대한 노력이나 결과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참여의 범위가 개인차원에 국한되거나, 혹 단체 간의 연대의 경우에도 참여 단체의 폭이 매우 좁거나 특정 이해관계 안에서만 연대 욕구가 부각되는 등의 한계 또한 그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공동의 담론이 사라지면서 시민사회는 개별 사업이나 프로젝트 중심으로 ‘치고 빠지는’ 모양새가 이어졌고, 그 후속을 도모하기도 어려워 단체 간의 연대감은 이를 위해 준비한 집행 예산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연대가 어렵거나 혹은 실무자 측에서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련해서 몇몇 가까운 단체의 활동가들에게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중복되는 이야기를 묶어 정리하자면, 연대체는 개인의 담당 업무 이외에 추가되는 일을 발생시키며, 개인적·조직적 차원의 이익이 적고, 연대체에서 결정된 것이 개별 조직에서는 관철되지 않는 경험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연대체의 필요성은 동의하나 그 진행 요구는 개인적·조직적 피로도를 상승시키고, 그 피로도의 상당 부분은 연대체 혹은 개별 단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동의 단계에 얽혀 있는 의사결정의 지난함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슨한 연대'의 방식은 보다 유연하고 지속가능한 형태의 상호작용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당신도 숙련된 활동가로서 비영리 영역 안에서 느슨한 연대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요? 느슨하고 느리더라도 변화의 첫걸음을 위해 ‘큰 연대’를 버리고 ‘작은 연대’를 취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작은 연대란, ‘단체 대 단체’가 아닌 ‘부서와 부서’ 간의 연대를 말합니다. 기관의 성격이 다소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직무는 존재하죠. 그런 공통직무를 중심으로 부서 실무자 간의 연대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민단체의 HR부서 간의 연대체라면 좀 더 포괄적인 ‘비영리단체다운’ HR 운영 방식을 논의하고 서로의 사례를 공유하며 더 나아가 실험하고 개선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단체의 미션을 시민들에게 확산하는 교육이나 캠페인 부서는 유사한 부서 간의 연대를 통해 특정 의제를 중심으로 모여 확산성을 담보하면서도 각 기관의 특성에 따른 다양성을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시민운동이 점점 올드해진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을 때마다 보다 빠르고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영리 기업들의 사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들은 고객지향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하여 때로는 파격적인 조직 운영 체계를 도입하여 팀과 직급의 구조를 탈피하고 효율성 있는 결정과 실행을 추구하는데, 결국 이것들은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한 선택인 것 같아요.
이러한 모델이 시민사회 안에서도 자율적으로 적용되면 어떨까요? 앞서 살펴본 작은 연대체 논의는 시민단체들을 더욱 젊게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작은 연대체들은 규모에 맞는 기획, 적은 리스크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으며 공동 학습과 그를 통한 담론 생성에도 용이합니다. 에릭 올린 라이트(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 1947~2019)는 미국의 사회학자로 미국사회학회 회장을 맡으며 계급 분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현실적 유토피아 프로젝트(Real Utopia Project)’를 이끌며 대안적 정치경제 체제를 오랜 기간 연구한 분이세요.)의 책 <리얼 유토피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사회란 단단하게 통합된 총체라기보다 느슨하게 연결된 체계’라는 개념 설명이 바로 그것이죠.
본문의 ‘사회’ 앞에 ‘시민’이라는 단어를 살짝 얹어 보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느슨하고 작은 것이 결국 단계적으로 단단하고 큰 것을 하나둘 만들어 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오늘의 활동을 있어나가 보자고요.
이런 논의가 시민사회영역에서 더욱 필요한 이유는 개개인의 업무 자체나 섹터 내의 보이지 않는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상생으로 인프라를 끌어 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호혜와 공존의 의미를 비영리단체들이 먼저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혹시 당신이 이를 만들어가는 외부 활동이 부담스럽거나 엄두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성격이나 직무 특성상 이러한 외적 확장이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많잖아요.
혹 시민단체라고 하면 다들 굉장히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이들만 모여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생각보다 내향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활동가 그룹도 그 안에는 퍽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반대로 외부활동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이들 중에 간혹 정작 본인이 속한 단체의 이슈를 놓쳐 조직 운영에 차질을 빚는 경우도 있어요.
무조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죠?
중요한 것은 균형감! 잊지 말자! 균형감!!
효율적인 포지션을 찾아 때로는 깊숙이 개입하고, 때로는 거리감을 두면서 유연하게 일을 하며, 가치와 본질에 집중하다가도 사업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방안에 몰입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연대와 협력에 힘을 쏟다가도 때로는 조직 내부활동에 집중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상황에 적절하게 일을 주도적으로 설계해 갈 수 있는 균형감이야 말로 숙련된 활동가에게 필요한 요소인 것이죠.
이러한 균형감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경험과 시간의 축적일 것입니다. 충분한 활동경험이 쌓여 그것을 균형감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모습이 진정 숙련된 활동가의 면모인 것이죠.
하지만 조직 안에서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기 시작하면 누구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새롭게 고민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시쳇말로 벌써 ‘고인 물’이 된 것은 아닌지, 새롭게 진입하는 에너지틱한 활동가들과 비교되기도 하고, 게다가 영리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과의 생활 격차는 한 없이 벌어지는 것만 같고⋯ 계속 실무 자리에만 앉아 있어 조직 안팎으로 영향력을 확장하지 못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나’ 싶은, 위축되고 자학적인 날들이 누구라도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확실히 말해두고 싶어요.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무척 중요한 활동입니다.
비영리단체마다 그 규모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립 시기나 성장세 또한 다양할 테죠. 하지만 어느 단체나 동일하게 조직 구성원이 버텨줘야 하는 시기나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개인의 희생적 관점이 아닌, 조직이 외부 활동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내부 에너지에 집중을 해야 하는 시기나 상황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그때 실무자들이 자리를 안정적으로 지켜주는 것은 조직적으로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막 시작한 신생 단체나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는 조직에서는 더더욱 업무와 사람이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람이 빠짐으로써 그 사업과 히스토리가 한꺼번에 같이 사라지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그렇기에 일정기간 경험을 쌓은 당신이 그 자리에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안타깝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당신은 지금껏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또 다른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역할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기회와 상황은 앞으로도 언제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매번 부침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은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에 좌절하며 자책하는 일도 있었겠죠. 하지만 숙련된 당신은 이 상황을 툭툭 잘 털고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사회변화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직선식이 거나 계단형으로 되어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새삼 돌아보면 사회변화는 나선형으로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시민활동가로서 가장 좌절될 때가 가시적으로 변화된 사회를 보기 힘들고, 결국 당신의 애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큰 흐름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새롭게 일어나는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아 보이거나 오히려 더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갑자기 임계점을 넘어 새로운 단계로 폭발하듯 나아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반복이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당신은 그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사회는 돌고 도는 듯해도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론이 있더군요. 바로 ‘사회혁신의 발전 프로세스’입니다.( <아산나눔재단, ‘사회혁신가의 여정과 역량 모델링’, 2021>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그림 2. 사회혁신의 발전 프로세스 (Marray, Caulier-Grice & Mulgan, 2010)>
해당 그림을 간단히 설명해 볼게요.
일반적으로 영리 영역 안의 변화 과정에서는 다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제기되고,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경쟁 원리에 의해 점차 걸러지면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아이디어가 생존하고 (시장, 사회, 조직에 의해) 채택되며 성과를 창출해 나가죠.
그런데 사회혁신의 과정은 이와는 조금 다른 과정으로 진행된다고 제프 멀간( 제프 멀간(Geoff Mulgan)은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의 집단 지성, 공공 정책 및 사회 혁신 교수이며, 영국교육제도의 혁신을 위해 '작업실 학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과 같은 학자들은 말해요. 그 과정을 도표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나선형 모델입니다.
먼저 사회혁신은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문제나 충족되지 않는 사회적 욕구에 의해 촉발됩니다. 그리고 최초의 단계에서는 관련 사회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한 진단 및 분석이 이루어지죠. 그다음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새로운 디자인이 창출되고 제안되어 그 선택지는 점차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다음 단계에서는 여러 아이디어들이 실제화 과정을 통해 시행착오와 갈등 조정을 거치면서 점차 검증이 됩니다. 그다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고, 그것을 동의하는 이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행되면서부터 사회혁신이 본격화돼요. 바로 이 지점에서 정리된 새로운 사회혁신 아이디어가 장기적으로 재정적 뒷받침이 지속될 수 있는지, 입법화되거나 제도화될 수 있는지 등이 세부 검토됩니다. 이후에는 그러한 혁신의 규모가 점차 커지며 확산되는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사회혁신의 궁극적 목적인 시스템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단계로까지 도달하게 됩니다(헉헉⋯).( 짧게 설명드렸지만 실제 역사 안에서 해당 과정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걸리는 내용들이겠죠.)
위의 이미지만 바라봐도 자연세계에서 구현되는 아름다운 피보나치수열의 황금비율( 이탈리아 수학자인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토끼 개체 수를 통해 일정한 규칙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피보나치 수열입니다. 이 수열로 나온 값이 바로 그 유명한 ‘황금비’로, 인간이 인식하기에 가장 균형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비율이라고 해요. 제 수학적 능력으로는 이 정도의 설명까지가 한계입니다만⋯)이 그대로 대입된 발전 모델 같지 않나요?( 미안합니다. 제가 좀 감상적이라 흥분했네요.) 물론 사회혁신의 진행 과정 안에서 이와 같은 단계들이 항상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며, 각 단계를 뛰어넘어 도약할 수도 있고, 각 단계가 서로 맞물려 진행될 수도 있으며, 단계별 되먹임(feed-back)의 과정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개별 과정과 과정이 엇갈려 가시적으로 성과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사회혁신 프로세스에 관한 해석은 사회혁신을 지향하는 비영리단체들에게 많은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비영리단체들은 시민사회 안의 다양한 주체들이 사회 속에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공공이나 시장 영역을 통하여 충족되지 못하는 욕구들을 해소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죠. 매우 혁신적인 방법론을 가지고요.( 수많은 사회적기업가들의 사례를 함께 꼽을 수 있겠네요. 관심이 있다면 각 지자체의 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관심 있는 사례를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숙련된 활동가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그들은 ‘어떻게든 사회는 변화(진보)한다’라는 굳은 믿음을 지닌 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믿음이 단순한 맹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작은 결과물들을 매번 확인하면서 가야 할 것이에요. 씨앗을 흩뿌려 놓고서는 저 멀리서 나무가 더디 자라는 것에 답답해하며 실망하는 것이 아닌, 그곳까지 가까이 다가가 싹이 나고 줄기를 뻗고 하는 것을 보아야 진정 나무가 자라고 있음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으니까요. 매일매일 자라나는 그 작은 싹이 매번 당신을 새롭게 꿈꾸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신 업무 안에서 이러한 작은 결과물들을 확인하고 피드백할 수 있는 여건을 계속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혹시 그것이 제한적이라고 한다면 앞서 말했듯이 주변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아요. 직접 나무가 자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면 누군가 나무 근처까지 보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도 좋겠죠.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을 조합해 나만의 변화 해석 능력을 키워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내용을 정리해 보죠. 앞의 내용을 조합해 보았을 때 숙련된 활동가란 단거리 주자라기보다는 마라토너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목적지를 알고 자신의 호흡을 고르며, 완주까지의 최적의 길을 확보하는 그들처럼 말이죠. 혹은 또 다른 비유를 덧대어 보자면, 멋지게 파도를 타는 서퍼와도 같을까요? 높은 파도가 다가와도 겁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더 높이 솟아오를 수 있는 기회(성장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겠죠)를 엿보는, 파도를 뚫고 가는 무모함보다는 파도의 힘을 빌려 앞으로 더 뻗어나가고자 하는 바로 그런⋯
⋯당신의 구릿빛 피부에 cheers~! ( 이 타이밍에 시원한 맥주 한 잔 하셔도 좋습니다. )
숙련된 활동가는 자신의 역할과 그에 따른 에너지 분배를 통해 효율적으로 일해요.
숙련된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메타인지적 시야가 필요해요.
조직 안의 이질적인 개인과 그룹 안에서 집단지성과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최적의 프로세스와 환경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퍼실리테이터’가 되어야 해요.
업무 영역의 확장을 위해 다소 느슨하고 느리더라도 뚜렷한 변화를 위해 ‘큰 연대’를 버리고 ‘작은 연대’를 취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어요.
숙련된 활동가란, 나선형의 사회발전 모델을 믿고 사회진보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를 말해요.